[광화문에서]고승철/대우車여! 세계로 가라

  • 입력 2001년 9월 23일 18시 45분


스포츠를 좋아했던 권력자가 있었다. 그는 축구경기를 보다가 때때로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작전지시를 했다고 한다. 감독은 고민에 빠졌다. 이런 지시까지 들어야 하나…. 권력자는 권투경기에도 작전주문을 냈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어퍼컷을 쳐라”는 등이었다.

대우자동차가 미국 제너럴모터스(GM)에 팔리는 과정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자주 벌어졌다. 한국측 협상책임팀이 눈치를 살펴야 할 곳이 너무도 많았다. 정부 각 부처의 움직임을 파악해야 하고 노조와도 줄다리기를 해야 했다. 부평공장이 차지하는 지역경제의 비중도 무시할 수 없었다.

대우차 고위 관계자는 “책임을 지지도 않을 정치인들마저 툭하면 부평공장에 찾아와 관심을 기울이는 듯한 ‘쇼’를 벌이는 바람에 어려움을 가중시켰다”고 털어놓았다.

노조원 일부가 GM 본사를 방문해 대우차가 외국 기업에 팔리면 안 된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이런 기류를 타고 대우차를 국민기업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대우차 현안이 그만큼 중요하니 이곳저곳에서 관여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 같은 중구난방식 개입 때문에 협상력만 약해졌다. 자신이 나서도 안될 일을 남에겐 무리한 협상성과를 요구했다. 경제논리는 희미해지고 정치논리, 사회논리가 얼굴을 내밀었다.

처음 포드와 GM이 인수대상자로 나타났을 때만 해도 대우차와 채권단측은 자신의 자산가치를 과대평가했다. 과거에 들어간 돈이 얼마이므로 얼마를 받고 팔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셈법은 국제무대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우리는 본전을 생각하는 데 비해 그들은 현재가치 또는 미래가치를 우선한다. 앵글로색슨의 현실적인 계산법에 따르면 비용으로 쓰긴 했지만 다시 회수할 수 없는 돈은 매몰비용(sunk cost)으로 돌린다. 이들은 ‘과거는 과거로 묻어버린다(let bygones be bygones)’는 원칙에 충실한 편이다.

대우차의 경우 과거에 미련을 두다 시간을 지나치게 끌었다. ‘헐값으로 팔면 안 된다’는 강박감에 빠져 버틴 탓에 오히려 헐값에 팔고 말았다. 무척 아쉽긴 하지만 협상책임자에게 작전지시를 한 ‘사공’이 너무 많아 배가 제대로 나가지 못한 점을 감안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자동차 산업의 앞날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세월이 흐를수록 대우차 가치는 더욱 떨어질 뿐이다.

미래를 보자. 한국은 세계 자동차 메이저 업체들의 각축장으로 떠올랐다. 세계 최대 업체인 GM이 거대한 아시아 시장의 전진기지로 대우차를 선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프랑스 르노가 삼성차를 인수한 것은 서곡에 불과했다. 현대차, 기아차는 한국 시장에서 메이저에 의해 위협받을 것이다. 그러나 다임러 크라이슬러가 현대차의 지분 10%를 갖고 있는 만큼 현대차도 순수 토종업체로 보긴 어렵다.

세계 자동차 업체의 재편 무대가 한반도에서 마련된다. 한국에선 국산, 외산 자동차를 구분하는 것이 모호해지게 됐다. 한국 최강자가 세계 챔피언이 될 수도 있는 셈. 한국에서의 자동차 품질 경쟁은 축구로 따지면 월드컵 지역예선이 아니라 2002년 본선과 같은 것이다. 이 땅의 정기(精氣)를 받아 탄생되는 ‘자동차님’들이여, 세계 정상급으로 뛰어올라 지구촌 곳곳을 누벼 보시라.

고승철<경제부장>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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