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충식]'욕질 문화'

  • 입력 2001년 9월 10일 18시 22분


때로는 남의 눈에 ‘내’가 더 잘 보일 수 있다. 그래서 귀에 거슬리더라도 맞는 말일 때가 많은 것이다. 한나라당에서 ‘외국인의 눈’으로 본 한국 정치와 지도자에 대한 평을 듣는 행사를 열었다. 그 비공개 자리에서 나왔다는 얘기 중에는 ‘과연!’ 하는 대목이 있다.

‘비난 문화(blame culture)가 너무 심하다. 국회 청문회도 정책 오류를 바로잡고 잘해보자는 자리가 아니라 증인을 죄인시하며 정치적으로 공격하는 마당이 된다. 대우자동차 협상 같은 데서도 지도자들이 여론을 잘 이끌어 주어야 하는데 비난이 두려워 책임을 지려는 사람이 없다.’(주한미국상공회의소 회장)

청문회는 미국의 그것을 본뜬 것이다. 하지만 여의도 의사당에서는 전혀 엉뚱하게 흘러간다. 석연치 않은 의혹이 있어 정치 문제까지 된 것이라면 그 속사정을 밝히고 파헤치며, 두번 다시 그르치지 않게 하는 것이 목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청문회는 온통 호령과 단죄의 푸닥거리 판이다. 그러니 국민은 아예 또 하나의 ‘정치 소극(笑劇)’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대우자동차 문제도 지금 와서 보면 얼마나 어리석게 끌어왔는지 드러난다. GM이 애당초 제시했던 조건은 결과적으로 너무도 좋았던 것이다. 그러나 포드가 끼어들어 공개입찰로 몰아갔다. 나중에 포드는 대우와 정부를 농락하고 정보만 몽땅 뽑아간 뒤 손을 털어 버렸다. ‘포드한테 당하고도 말 한마디 못하고’라고 탄식한 건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고 정부측에 물어 보니 당장 ‘청문회는 누가 감당하느냐’는 답변이었다. 포드가 처음부터 수상쩍었지만, GM과 수의계약을 하면 특혜다 의혹이다 해서 욕먹고 맞아 죽고 대대손손 역적이 된다는 얘기다. 변명같지 않은 변명일 수 있다. 그러나 이상한 청문회 구조, 정치게임 방식, 비난문화가 대우차 재앙을 키운 한 요소임을 외국인이 꿰뚫어 보고 있지 않는가. 국익을 위한 선택이 무엇인지 내다보면서도 거꾸로 흘러가는 정치와 행정의 무책임, 그래서 녹아나는 것은 나라요 국민이다.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토론이 없는 점이다. 정치권은 법안을 제대로 토론하지 않고 통과시켜 버린다.’(외국기업 한국부사장) 같은 자리에서 나온 말이다. 마치 국회에서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안을 표결하는 날, 추가경정예산안을 덤으로 처리해 버린 것을 말하는 것만 같다.

세금 내는 국민을 생각한다면 5조555억원의 추경안을 토론 한마디 없이 방망이 쳐 넘길 수 있을까. 그야말로 본말이 뒤바뀐 짓이다. 국민이 보기엔, 통일부장관 한 사람의 거취를 놓고 통일이 되고 안되고, 국가 존망이 걸린 것처럼 떠들며 사생결단하듯 하는 것 자체가 우습다. 정치권에서 세싸움 기싸움을 벌이는 것일 뿐이다. 그 이상한 파워게임에 국회의원 260여명이 목숨을 걸다시피하고 정작 추경안은 덤으로 날려 버렸다. 기막힌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혹자는 우리 정치에 왜 토론이 없느냐고 되물을지 모른다. 그러나 욕설과 비아냥, 궤변 놀음이 판을 칠 뿐 토론이라기 어렵다. 숫자를 가지고 합리성을 따지고 고민하는 국회라고 누가 우길 것인가.

‘대변인 제도에 문제가 있다. 이슈가 있을 때마다 대변인들이 나서서 말다툼을 벌이는데 선진국에서는 당수 총재가 직접 나선다. 그래야 책임있는 정당으로서 수권 이미지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서울주재 일본 언론인) 역시 그 자리에서 나온 말이다.

외국인의 눈에도 한국 대변인들의 욕설 경연은 딱했던 모양이다. 날이면 날마다 삼빡한 말장난으로 상대를 약올리고 골탕먹일 수 없을까 궁리한다. 그런 ‘허가 낸 욕쟁이’를 고용하고 간판으로 앞세우는 정당이 한국말고 또 있을까. 대변인의 비난과 성토가 점잖아 성에 차지 않으면 의원과 부대변인들이 나서서 욕질의 밀도와 함량을 높인다.

웃기는 해도 눈물이 나는 말 말, 서글프고 어설픈 말들. ‘이민박람회에 4만명이나 몰리는 것을 보니 빨갱이 나라 될까봐 떠나려는 사람이 많기도 하다’ ‘이회창 총재(昌)와 김종필 명예총재(JP)가 손잡은 창피(昌P)연합’. 갖은 말장난으로 지고 샌다. 그래서인지 인터넷 토론방에도 온통 정치에 더럽혀진 욕설이다. 이 나라 디지털 문화는 욕질로 열리고 있다. 다들 해답은 뒷전이고, 비방 비난 욕질로 초가 삼간 태우는 것이 속 시원하고 즐겁기만 하다.

김충식<논설위원>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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