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홍찬식/문화계의 빈부격차

  • 입력 2001년 9월 9일 18시 55분


문화계가 ‘책 사재기’로 시끄럽다. 대형 서점의 베스트셀러 명단에 오르기 위해 출판사들이 아르바이트 학생을 시켜 책을 사들인다는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서점에서 특정 서적을 집중 구매하면 그 책의 베스트셀러 순위는 상승할 것이고, 출판사로서는 책 판매가 탄력을 받는다는 것이다.

‘인기 순위 조작’에 해당하는 이 문제를 놓고 문화계 인사들은 ‘다른 상품도 아닌 책을 펴내는 출판사들이 이럴 수가 있느냐’며 개탄하고 있다. 하지만 출판사도 결국 영리를 추구하는 곳이기는 다른 회사와 마찬가지다. 정작 안타까운 것은 ‘책 사재기’ 파동이 우리 문화계의 취약한 부분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점이다. 이번 파동을 통해 우리가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사실은 대략 두 가지다.

그 하나는 아르바이트 학생 몇 명을 동원해 책을 사들이면 당장 베스트셀러 순위에 큰 변동이 있을 정도로 출판 시장이 영세하다는 점이다. 국내의 대표적인 서점인 교보문고의 경우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려면 한 주에 400, 500권 정도만 팔리면 된다고 한다. 이것은 대중적인 책인 경우이고 인문학 같은 학술서적은 한 주에 몇 십 권만 팔리면 곧바로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다. 시중에 배포되기도 전에 수십만장씩 선(先) 주문을 받는 인기 가수의 음반과 비교하면 국내 출판시장은 ‘시장’이라고 부를 것도 없다.

다른 한가지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는 이유만으로 책이 팔리는 국내 ‘독서 수준’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사재기’ 출판사들을 두둔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이들이 사재기의 유혹에 빠지는 것도 베스트셀러 명단 그 자체로 책 판매를 어느 정도 보장 받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책을 고를 때 여전히 베스트셀러 목록을 참고한다는 사실이 출판사들의 공공연한 비밀인 ‘사재기’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이 같은 문화시장의 좁고 답답함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최근 일부 문화 분야의 호황으로 인해 어두운 그림자가 더욱 짙어 보인다. 요즘 다들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하지만 불황을 모르는 대표적인 곳이 바로 영화계다. 대중문화의 한 축인 가요 분야도 ‘한류(韓流)’ 물결을 선도하며 성장세를 구가하고 있다.

영화계에는 수천억원의 돈이 투자할 곳을 찾아 떠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고 문화관광부는 발빠르게 ‘한류’와 관련된 대중문화 분야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이 힘든 처지에 있던 다른 문화 종사자들에게 이런 소식은 부러움보다는 좌절감을 안겨준다.

이 분명한 대비는 문화계에도 빈부격차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빈부격차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가난한 쪽이다. 영화는 영화대로 잘 되어야 하겠지만 다른 문화 분야가 함께 커가지 않으면 영화마저도 곧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문화 각 장르는 어느 분야보다도 거미줄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다른 문화들이 낙후되어 있는데 유독 어느 한 분야만 두드러지는 것은 단기간이면 몰라도 오래 계속될 수 없는 것이다. 출판사들의 부도덕한 ‘책 사재기’를 놓고 한편으로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홍찬식<문화부장>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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