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찬의 문화비평]전자수첩의 효율&종이수첩의 편리

  • 입력 2001년 5월 1일 18시 52분


임원실, 독자서비스센터, 논설위원실, 편집국…. 여러 해 동안 별탈 없이 사용되고 있는 동아일보사 직원수첩의 본사 부서별 전화번호 배열 순서다.

간호대학, 경영대학, 공과대학, 농업생명과학대학, 미술대학, 법과대학, 사범대학, 사회과학대학…. 최근 일부 단과대학 교수들이 반발하며 수첩을 집단 반납했다는 2001년 판 서울대 교직원 수첩의 단과대학별 전화번호 배열 순서다.

인간이 자기 두뇌의 정보 저장 능력에 만족하지 못해 보조장치로 만들어 낸 걸작품 ‘수첩’.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곁에 두고 있어야 하기에 크기는 작아야 하고, 저장 정보량은 많아야 하며, 검색은 빨라야 한다. 이 때문에 각 집단에서 만드는 수첩은 그 정보 저장 및 검색 방법에서 효율성의 극치를 보여준다.

몇 해 전부터 전자수첩이 등장해 애용되고, 최근에는 컴퓨터 기능까지 넘보는 PDA(개인용 휴대단말기)도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이 새로운 수첩들의 장점은 메모리만 확장하면 새 정보를 무한정 담을 수 있고, 기존 정보를 수시로 개선할 수 있으며, 그 정보를 컴퓨터나 다른 수첩과 공유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가나다순이나, 알파벳순, 또는 아라비아숫자 순 등 단순한 기준으로 많은 정보를 빠르게 정리 및 검색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아직 대부분의 집단에서는 여전히 종이수첩의 형식으로 수첩을 만들고 있다. 그 이유는 우선 모든 사람이 편리하게 수첩의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표준화된 단말기와 저장형식이 마련되지 않아서겠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정보의 배열 및 검색 방식에 있다.

▽기계적 배열과 가치판단 반영 차이

종이수첩의 정보는 대체로 가나다순이 아니다. 각 부서의 순서는 그 집단 전체에서의 중요도나 설립 순서를 반영하고, 구성원 순서는 직급이나 학년 등을 따른다. 이는 전자수첩이나 PDA에서처럼 기계적 연산방식에 맞춘 정보의 배열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관에 맞춘 정보 배열 방식이다.

동아일보사 수첩에서 독자서비스센터가 임원실 바로 다음에 위치하고 정치부가 경제부 앞에 위치하는 것은 동아일보사와 구성원들의 가치판단 및 공감대를 반영한 것이다. 여기에는 전자수첩이나 PDA의 일률적인 ‘가나다순’이 담지 못하는 이 집단의 ‘가치관’과 ‘역사’가 있다. 가치관과 역사를 담아내는 이 기술은 아직 전자수첩과 PDA가 배우지 못한 종이수첩만의 비법이다. 이는 무질서해 보이는 전통적 배열이 담고 있는 다른 차원의 ‘편리성’과 ‘효율성’이다.

서울대 교수가 아니라 할지라도, 사람이 기계적 연산의 편리성과 효율성에 적응하기를 강요하는 ‘단순한’ 발상에 대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간은 가나다순으로 사고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대학과 사회에 숱하게 쌓인 문제에 대해 무책임하게 방관하던 교수들이 ‘겨우’ 수첩 하나 갖고 이처럼 일사불란한 단결력을 보일 수 있느냐는 비난을 한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다.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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