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IN&OUT]<푸른 안개>에 대한 아줌마의 생각

  • 입력 2001년 5월 1일 17시 10분


요즘 우리 아줌마들 사이에 <푸른 안개>가 화제다. 안정된 가정의 가장이 파릇파릇한 여대생과 사랑에 빠져 정신 못차리고 착한 아내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이야기니 아줌마들이 흥분할 만도 하다.

내 주변에도 "나 같으면 두 년놈을 가만 안둬! 너 죽고 나 죽자 할꺼야!"라는 열혈부인이 있는가 하면 "이 때가 기회다!"라며 냉큼 이혼을 할꺼라는 무서운 아줌마도 있고, "갈라서면 결국 남 좋은 일 시켜주는 것!"이라며 끝까지 남편을 내놓지 않겠다는 의지의 아줌마도 있다.

남편의 늦사랑이라, 아줌마들에겐 한마디로 재앙일 것이다. 가정 하나 잘 지켜온 걸 평생의 보람으로 생각하며 나 하고 싶은 것보다 남편이 원하는 것, 나 먹고 싶은 것보단 아이들이 먹고 싶어하는 걸 먼저 챙겨왔는데….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니 웬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

게다가 짜증나게도 드라마 속 이경영은 바람피우는 걸 눈 감아주고 싶을 만큼 너무 괜찮은 남편인데다 둘의 사랑은 참 보기에도 안타깝고 이뻐보인다. 바람이나 불륜이라면 으레 등장하는 느끼한 아저씨와 발랑 까진 여자애의 추잡한 정사가 아니라 정말 사랑인 듯 보인단 말이다. 'TV에서 노골적으로 불륜을 아름답게 포장한다'는 푸념에도 일리가 있다.

철없는 아저씨들은 자기 나이 반도 안되는 여자와 사랑에 빠진 이경영을 부러워한다고도 한다. 하지만 아줌마인 난 <푸른 안개>를 보면 등골이 오싹한다. 불륜을 조장하거나 미화해서가 아니다. <푸른 안개> 이경영의 사랑이 너무 있을 법해서다.

유부남이 사랑에 빠지는 게 아내가 못됐거나,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이거나, 원래 바람기가 다분한 난봉꾼이어서가 아니라 인생의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 이 사실을 너무 담담하게 보여줘서 보는 아줌마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거다.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내 남편의 사랑’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기 때문에 무서운 거다.

뭐, 생각은 그렇다. 혹시라도 내 옆에서 “저렇게 이쁜 마누라를 두고...미쳤구만!”하는 내 남편이 다 늙어서 사랑 운운하면서 내 뒤통수를 친다면? 우아하게 “사랑 찾아 가거라!”하고 싶다. 하지만 <푸른 안개>를 보다 보면 결국 나도 김미숙처럼 “내 옆에서 늙어 죽어!”라고 악을 쓸 거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푸른 안개> 속 김미숙의 시커멓게 타는 속이 재수없으면 나에게도 벌어질 수 있는 미래란 사실이 두려울 뿐이다.

<푸른 안개>를 보며 '사랑이다, 불륜이다'를 논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여유가 있는 사람이다. 사랑을 사랑 자체로 보기엔 이미 주변이 복잡하고 생각이 많아진 아줌마는 <푸른 안개>를 보며 엄마 아빠를 하나도 안 닮은 그 집 딸 걱정하고,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란 타이틀로 평생을 살아갈 김미숙을 불쌍해하느라 이경영과 이요원에게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다.

둘이 불타는 사랑을 하는 건지, 불장난을 하는 건지 그저 정신 좀 차렸으면 싶다. 하긴 정신이 차려지면 사랑이 아니겠지만.

누가 “내 인생에 더 이상 사랑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언젠간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존재”인 남편들과 아내들에게 <푸른 안개>는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사랑은 무엇이고 결혼은 무엇인가? 남자와 여자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모든 게 푸른 안개 속에 감춰진 듯 모호하지 않은가?

조수영 <동아닷컴 객원기자> sudatv@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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