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허영/누굴 위한 개헌론인가

  • 입력 2001년 4월 5일 19시 31분


정치권에서 개헌문제가 계속 제기되고 있다. 대통령 임기를 4년으로 해서 중임을 허용하고 부통령을 두자는 것이다. 과거의 개헌이 늘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통치구조를 바꾸자는 것이다.

그러나 개헌논의를 지켜보는 국민은 참으로 어리둥절하다. 기둥이 썩어서 집이 무너지기 직전인데 엉뚱하게 지붕부터 고치자는 이야기로 들리기 때문이다. 나라의 재정과 경제가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책임의식이 있는 정치인이라면 어떻게 개헌문제를 들고나올 수 있단 말인가.

개헌은 때가 있는 법이다. 지금은 개헌을 논할 시기가 결코 아니다. 모두가 합심해 무너져 가는 경제부터 살려야 한다. 이런 시기에 개헌을 하자는 것은 정략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경제의 미래가 향후 6개월에 달려 있다는 것이 경제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진단이어서 금년 말까지는 경제에 매달려도 모자랄 판이다. 따라서 금년 안에 개헌을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어렵다. 개헌에는 절차적으로도 최소한 넉달 정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선바람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할 내년 초부터는 개헌이 화두가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일부 정치인들의 개헌논의는 동기도 순수하지 못하다. 권력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서기 위한 정략적 의도가 내포돼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사사로운 정치적인 야욕일 뿐 국민의 관심사도 아니고 국익을 위한 것도 아니다. 권력에 다가서기 위해서라면 개헌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발상은 과거 독재자들이 정권 연장을 위해서 개헌을 수단으로 삼은 것과 무엇이 다른가.

개헌은 물론 금기사항은 아니다. 그러나 개헌은 헌법의 규범적인 효력을 높이기 위해 하는 것이지 일부 정치인들의 정치적 야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하는 일은 아니다. 우리 헌법이 지금 개헌을 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규범적인 효력이 약화됐다고 볼 수도 없다. 대통령이 제왕적으로 군림한다는 지적은, 그것이 만일 사실이라면 단임제 때문도 아니고 부통령이 없어서도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통치 스타일의 문제이고, 우리 정치의 후진성에서 오는 현상이기 때문에 개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대통령 중임을 허용하고 부통령을 두는 것은 원론적으로는 필요하지만 반드시 선행조건이 있다. 우리 헌법에서 의원내각제적인 요소를 모두 없애는 작업부터 이뤄져야 한다. 총리제부터 없애고 대통령이 책임정치의 전면에 나서도록 해야 한다. 실권도 없는 총리를 정치적인 방탄벽으로 삼아 대통령직을 성역화하고 있는 지금의 의원내각제적 요소를 그대로 놔둔 채 대통령 중임을 허용하면 대통령의 제왕적 지위는 더욱 강화될 따름이다. 대통령 중임과 부통령제는 미국의 순수 대통령제를 전제로 하는 헌법상의 제도이다.

부통령을 두자는 이유도 출신지역을 달리하는 부통령을 통한 동서화합을 이루자는 것이라면 그것은 제1공화국 시대의 정부통령제의 실패를 되풀이하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역적인 지지기반을 달리하는 대통령과 부통령이 지역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서로 대립하는 상황이 연출되면 국정 파탄은 물론이고 지역간 대립과 갈등은 오히려 제도적으로 굳어지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지금의 여야간 세력분포로 볼 때 개헌논의는 필연적으로 개헌을 볼모로 하는 정치권의 이합집산을 초래할 것이다. 그런데 의원내각제 개헌을 볼모로 탄생한 DJP 정부가 집권 후에 개헌 선거공약을 너무 쉽게 파기하는 것을 지켜본 국민은 개헌을 볼모로 한 정치적인 야합에 더 이상 동조할 생각이 없다. 개헌에서 최종적인 열쇠를 쥐고 있는 주권자인 국민이 원치 않는 개헌을 도대체 누가 어떻게 성사시키겠다는 것인가. 국민을 계도하고 설득하면 국민이 쉽게 개헌에 찬성하리라는 생각으로 추진되는 개헌이라면 시대착오적인 정치적 오만이며 국민을 허수아비로 착각하는 일이다.

정치권이 진정으로 국민주권을 존중하고 국민과 나라를 생각한다면 더 이상 개헌문제로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지 말아야 한다. 내년 대선 때 개헌을 선거공약으로 제시해 주권자의 의사를 확인한 뒤 개헌을 논의해도 늦지 않다. 지금은 개헌보다 중요하고 시급한 일들이 너무도 많지 않은가.

허영(연세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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