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고개 숙인 수정주의

  • 입력 2001년 3월 30일 19시 01분


◇우리 눈으로 본 탈냉전후 수정주의

전상인 지음

452쪽 1만2000원 전통과현대

책은 저자(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스스로 밝히듯이 처음부터 한 권의 저서로 구상 집필한 것이 아니라 이미 발표한 논문들을 모은 논문집이다. 그러나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흐름은 ‘고개 숙인 수정주의’다. 수정주의란 무엇이며, 왜 수정주의는 고개를 숙여야만 했던 것일까?

지나간 사실로서의 역사는 결코 바뀔 수 없지만, 지나간 사실에 대한 해석으로서의 역사는 거듭 바뀐다. 그런데 냉전시대와 관련해 수정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할 경우, 이것은 대체로 미―소 냉전의 기원과 연관해 소련의 일방적 책임을 강조했던 전통주의와 구별짓기 위한 용어로서 사용된다.

전통주의적 해석에서 스탈린과 같은 개인이 돌출했다면, 수정주의적 해석에서는 세계체제와 같은 구조가 강조됐다. 소련의 공격적 행태를 인정하면서도, 세계를 움직이는 심층적 구조에 보다 많은 관심이 모아졌다. 한국어권의 독자들에게 수정주의라는 용어가 보다 친숙해진 것은 냉전의 기원에 대한 수정주의적 해석에 이어 한국 전쟁과 현대사에 대한 수정주의적 해석이 국내에 소개되면서부터였다. 1980년대 새로운 사료와 자유로운 사고의 결합은 한국판 수정주의 열풍을 낳았다.

그러나 냉전의 종언은 전통주의와 수정주의 양 진영 모두에게 하나의 재난으로 닥쳐왔다. 더 이상 좌와 우 어떤 편의 이념적 과잉도 허용되기 어려워졌다. 냉전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던 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냉전체제가 성립된 지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연구자들은 다른 차원에서 조용한 열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조용한 열전을 준비하는 수정주의자의 숙여진 고개 아래는 사실을 담은 사료들이 놓여 있었다.

1990년대를 맞이하면서 한국의 수정주의도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숙여진 한국 수정주의자들의 눈 아래에는 외국의 수정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사실을 담은 사료가 놓여 있었다. 동시에 그 발 밑에는 한국이라는 땅이 존재했다. 적어도 이 땅에 대한 역사는 우리가 기록하겠다는 열망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외국 수정주의자에 대한 콤플렉스와 알레르기를 동시에 극복하고자 하는 희망, 나아가 외국에서 수입된 거미줄에 한국의 현실이 걸리기를 기대하는 학문적 풍토에 대한 반성, 한국적 특수성이라는 보호막에 안주하지 않고 세계적 보편어로 한국의 현실을 설명해보겠다는 욕구 등으로 인해 창 밖으로 내밀었던 고개를 다시금 이 땅 위에 숙이게 된 것이다.

이 책에 실린 10편의 논문은 냉전 종언 이후의 사실을 담고 있는 사료를 향해 고개 숙이고, 아울러 스스로 서 있는 땅을 향해 고개 숙였던 저자의 치열한 문제의식을 담아낸 연구의 결실이다.

독자들은 수정주의가 골몰했던 구조에 함몰되지 않고 역사적 사실 앞에 당당하게 맞서고자 하는 저자의 용기를 높이 평가할 것이다. 동시에 역사적 희생자에 대한 동정심과 승리자의 주장에 대한 회의를 간직함으로써 지배적 신화에 동화되지 않으려는 그의 노력에도 깊은 경의를 표하게 될 것이다.

김명섭(한신대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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