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택칼럼]국민은 세 번 속았다

  • 입력 2001년 3월 28일 18시 56분


김대중(金大中·DJ) 대통령은 연초 이른바 의원 꿔주기로 자신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자 “인기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 말은 좋게 보면 누가 뭐래도 소신껏 내 할 일 하겠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보면, 민심에 귀기울이기보다는 내 판단 만이 옳다는 독선과 오만, 오기(傲氣)의 정치를 합리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밑바탕에는 우중(愚衆)의 여러 소리보다는 개명(開明)군주 한사람의 총명으로 나라를 이끌어 가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전형적 DJ식 인사▼

이번 개각을 보면 김 대통령이 인기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연초의 다짐을 지켜나가고 있는 것 같다. 인기야 이미 떨어질 만큼 떨어졌으니 내 스타일 대로 가겠다, 평가는 훗날 받겠다는 생각인 듯 하다. 개각에 대해 여러 갈래의 비판이 있다. 국정쇄신과는 거리가 먼 자리 나눠먹기에 불과하다는 소리가 많은가 하면, 부정과 비리에 연루됐다는 ‘강한 의심’을 받는 사람이라도 자기 사람이면 챙기고 보는 전형적인 ‘DJ식 인사’라는 평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또 속았구나’ 하는 기분이 드는 부분이 있다. 꿔주기 의원의 간판격인 장재식(張在植) 의원의 입각이 그것이다. 하도 기막힌 일들이 잇달아 생기니까 웬만한 사건은 곧 잊혀져 버린다. 유권자의 민의를 배반한 의원 꿔주기도 불과 2개월여 전의 일인데 벌써 많은 사람들은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장 의원 입각으로 그것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 씁쓸한 기분을 되씹게 한다.

의원 꿔주기만으로도 국민은 세 번 속은 셈이다. 첫 번째는 지난해 말 민주당의원 3명이 자민련으로 옮겼을 때다. 당시 여권에서는 신문보도를 보고 알았느니 세 의원의 ‘자진이적’이니 하면서 둘러대기 바빴다. 국민으로서는 뻔히 알면서도 속아야 할 판이었다.

이런 일이 또 일어날 리는 없으리라고 믿었던 보통사람들의 뒤통수라도 치듯, 세 의원 꿔주기가 있은 지 불과 열흘 후 장재식 의원이 ‘거사’를 함으로써 국민은 두 번째 속은 것이다. 장 의원은 ‘거사’직후 “나는 입각하게 돼 있다”고 큰소리 쳤다. 하지만 순진한 백성은 아무렴 이 정부도 최소한의 염치는 있겠지, 설마 꿔주기를 하면서 장관자리 약속까지 했겠느냐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판에서 염치를 얘기하는 것은 사치다. 이번에 보아란 듯이 장관을 시키지 않았는가. 국민은 세 번째 속은 것이다.

하기야 DJP공동정권이 들어선 후 속은 것이 한 두번이 아니니까 새삼 분노하고 흥분하고 할 기력도 없다. 내각제 사기극도 있었고, 4·13총선 때 자민련의 야당선언 기만극도 그럴듯하지 않았나. 앞으로 어떤 식의 속임수가 또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통령이나 총리도 보건복지부장관한테 속아넘어갔다고 하는 판이니 정치나 행정에 무슨 신뢰의 싹이 자랄 수 있겠나.

▼ ‘개혁’앞에는 법도 없다▼

의약분업 문제 만해도 국민이 분노하는 것은 정부가 ‘개혁’이란 이름으로 사실상 국민을 속였기 때문이다. 의약분업을 실시하면 약물 오남용이 줄어들고 의보재정 지출이 감소할 것이라는 말을 믿고 국민은 의료대란을 겪으면서도 갖가지 불편을 꾹 참아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의보재정 적자가 4조원이되니 5조원이되니 하고 있고 항생제 오남용도 줄지 않았다고 하니, 국민으로서는 이렇게 억울할 수가 없다.

면밀한 수술준비도 없이, 수술 후의 후유증 대책도 없이 우선 칼로 째놓고 보자는 식의 개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의료개혁이 그렇고 교육개혁 또한 그렇다.

‘개혁’이란 바람 앞에서는 합리적인 비판이나 민심도 고개를 들면 안된다. ‘개혁’앞에는 법도 없다. 대통령 스스로가 작년 총선 때 선거개혁 바람 앞에서는 ‘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식의 말을 함으로써 초법적 개혁바람에 부채질을 했다.

요즘 언론계 안팎에 거센 바람이 일고 있다. 역시 개혁바람이다. 김 대통령이 연초 언론개혁의 운을 떼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세무조사에 공정거래위원회 조사, 그리고 신문고시(告示)까지 총동원되는 상황에서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온다. 그 바람이 어디서부터 불어와 어디로 갈지 모르겠지만 독자들은 어렴풋이 나마 짐작은 할 것이다. 어려운 세상을 살아오면서 이런 저런 바람을 다 겪어 봤기 때문이다.

어경택<논설실장>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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