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한국 경제의 거인을 보내며

  • 입력 2001년 3월 22일 18시 36분


6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개발은 일제의 수탈과 전쟁으로 피폐한 초근목피의 농업국가를 40여년 만에 세계 10위권의 신흥공업국가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현대그룹의 위상과 정주영(鄭周永) 전명예회장이 남긴 유산에 대해 다면적인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개발경제시대에 정 전명예회장과 현대그룹이 수행한 성장 견인차적 역할을 빼놓고는 오늘의 한국경제를 말할 수 없다.

정 전명예회장은 불패의 도전정신 추진력 그리고 타고난 부지런함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대사업을 성공시켜 세계를 놀라게 하는 일이 많았다. 70년대 사회 일각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닦은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朴正熙) 전대통령과 정 전명예회장의 합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인은 동해안의 작은 어항을 세계 최대의 조선소로 바꾸어 놓았고 중동붐을 주도하며 벌어들인 오일달러로 국부 증진에 크게 기여했다. 한국은 현대가 만든 포니 엑셀의 신화를 발판으로 세계 5위의 자동차 생산국으로 올라섰다.

인간 정주영의 삶은 곧 한국경제가 지나온 궤적과 일치한다. 강원 통천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소 판 돈을 훔쳐 서울에 올라와 막노동과 쌀가게 엿공장을 거쳐 최대의 재벌그룹을 일궈낸 일생은 코리안 드림의 상징이다.

실향민이었던 고인이 말년에 열정을 쏟은 대북사업에 대해 정확한 평가를 내리기는 아직 이르다. 다만 소떼 방북과 금강산관광 등 대북 프로젝트는 유일한 냉전의 섬에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남북 화해협력의 새 시대를 여는 데 밑거름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고인이 기업인으로서의 삶을 일관하지 못하고 92년 정치 외도에 나선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의 정치참여와 실패는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왕회장’으로 상징되는 경영방식은 개발경제시대에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지금의 글로벌 기업 환경에는 맞지 않는다. 셋으로 분가한 현대그룹 중 하나가 어려움을 겪는 것도 개발경제 시대의 경영방식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 가족은 정주영 전명예회장이 남겨 놓고 간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살펴보면서 고인의 유업인 현대그룹과 미처 마무리짓지 못한 대북사업이 알찬 결실을 보도록 힘을 합해야 할 것이다.

고인은 현실에 부대끼며 행동하는 선각 기업인으로서 이 나라에 뛰어난 족적을 남겼다. 거인을 잃은 한국 경제의 상실감이 크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