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교수의 법과 영화사이]비욘드 랭군

  • 입력 2001년 3월 13일 14시 06분


(존 부어맨 감독, 1995년)

“광란의 정부와 선량한 국민.”

독재국가를 여행한 인도주의자들이 내리는 보편적인 결론이다. 아직도 미얀마는 공포와 죽음의 정글이다. 그야말로 세계 인권의 사각지대이다.

▼미얀마 여행나선 女의사▼

그러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땅이다. 그 땅에 인류의 이름으로 내걸어야 할 깃발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이라는 깃발이다. 그래서 ‘한국 앰네스티 4그룹’이 펴낸 미얀마 인권운동사의 제목은 ‘내릴 수 없는 깃발’(2001년)이다. ‘인권의 보편성’을 외치는 국제사회의 여론, 이에 맞서 ‘내정간섭’과 ‘주권침해’의 항변을 내세우는 군사정부, 우리의 역사에서도 결코 낯선 일이 아니다. “랭군을 벗어나지 말 것.” 1988년, 전국을 민주화의 물결이 휩쓸 때 외국인 여행자에게 부과된 조건이자 경고이다.

그로부터 10년 후, 국제사회의 압력에 굴복한 군사정부는 6년간에 걸친 아웅산 수지의 가택연금을 해제하면서 똑같은 조건을 경고했다. ‘버마’가 ‘미얀마’로, ‘랭군’이 ‘양곤’으로 바뀌었지만 실체는 마찬가지, “비욘드 랭군’의 장벽은 견고하다. 아직도 체포, 살육에 군사정부는 서슬 퍼렇고 기아 수준의 빈곤이 문제의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88항쟁’의 절정시기, 무뢰한의 폭력에 남편과 아들을 잃은 미국 여의사가 ‘동양’ 여행에 나선다. 막연히 ‘동양’일 뿐, 버마가 동양의 어디인지도 모르는 보통 미국 사람이다. 행여나 황폐한 자신의 정신세계를 ‘동양’의 신비에서 충전받을 수 있을까, 벽안 여인의 순진한 낭만은 실로 절박한 버마 땅에서 추락한다.

랭군의 거리에서 조우한 격렬한 데모대, 가로막는 경찰의 총부리를 미끄러지듯 고운 자태로 물리치는 여인, 이 기묘한 대치 장면에서 동양의 신비를 발견한다. 가녀린 몸에 세상의 모든 위협을 흡입하여 녹여버리는 아웅산 수지의 검은 두 눈동자에서 부처의 재현을 본 것이다. 대학에서 내 쫓긴 지식인 가이드를 만나면서 여행자의 구도(求道)와 개안(開眼)의 길이 열린다. 일시적인 객기로 나선 ‘비욘드 랭군’의 여행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학생, 발포하는 경찰, 숨겨주는 농부, 죽음과 도피, 수백만의 금빛 파고다가 이라와디 강 젖줄에 주저리주저리 매달린 비옥한 땅에 피의 역사가 기록된다.

각종 신고(辛苦) 끝에 국경너머 태국 땅으로 도피에 성공한다. 피난민 캠프에 도착하여 안도의 숨을 내쉬기 무섭게 “나도 의사다”라고 선언하며 환자를 보살핀다. 낯선 땅에 인도주의의 깃발을 내걸고 새 삶을 찾는 것이다.

▼이국땅서 인도주의 실천▼

‘아웅산 묘소 폭발사건’(1983), 당시 대통령을 수행하다 산화한 동량들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을 주고받으며 역사는 우리에게도 랭군의 참혹한 기억을 극복할 것을 주문한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에게는 ‘비욘드 랭군’이다.

(서울대 법대 교수)

ahnkw@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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