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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3월 8일 18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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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자연에서 강렬한 생명의 리듬을 느끼게 하는 것이 있다. 오름이다. 오름이란 한라산이 분화(噴火)할 때 생겨난 기생화산(寄生火山)이다. 한라산이 어머니라면 오름은 자식들인 셈이다. 무려 330개가 넘는다. 세계적으로 한라산처럼 많은 소생을 거느린 화산도 없다.
유난히 춥고 눈이 많았던 지난 겨울을 깨치며 오름에 봄이 온다. 바람꽃의 투명한 실핏줄이 바이올린 현처럼 떨리며 피어난다. 노루귀풀은 흙덩이를 들추며 솜털 귀를 쫑긋거리고 복수초가 황금빛으로 핀다.
오름을 오르노라면 내 안에 켜켜이 눌었던 사람살이의 때가 하나씩 떨어져 나간다. 심신이 정갈해진다. 자연의 미세한 떨림에 마음의 공명판(共鳴板)이 울린다.
그러나 요즘 들어 오름으로 가는 내 발걸음이 예전처럼 가볍지 못하다. 상처 입은 모습이 여기 저기서 눈으로 달려든다. 어느 날 보면 계절마다 꽃을 피우던 야생화 들판이 골프장으로 변해 있다. 한 사람은 앞서고 또 한 사람은 뒤따르며 도란도란 걸어가면 좋았을 오솔길이 사람들 발길로 움푹 패어 위험한 굴헝(구렁)으로 변해 있기도 하다. 이제 막 아장걸음하는 아기 같은 알오름은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없다. 마징가제트 같은 송전철탑이 살벌하게 늘어섰는가 하면 관광객을 위한 위락시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야생란이나 희귀종 식물을 캐다가 팔기 위해서 너도나도 떼지어 오른다.
언제부턴가 개발이 문명의 척도요, 자연은 인간을 위한 소모품이라는 풍조가 우리를 오염시키고 있다. 아름다운 풍광을 만나면 자연이 주는 신비한 메시지에 귀기울이려 하기보다는 고기를 구워 먹을 생각부터 하게 돼버린 우리.
오름은 제주의 생태자원이며 살아있는 보석이다. 분화구, 화산탄, 쇄설물 등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만져볼 수 있는 자연학습장이며 곤충과 야생식물의 집이다. 세상의 어떤 돈으로도 계산할 수 없는 값어치를 지니고 있다. 오름이 훼손되는 것은 우리의 자존심이 상처받는 것과 같다.
제주 자연의 백미(白眉)인 오름이 갈피마다 사람에 의한 상처로 아프다.
김순이(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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