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거미줄'

  • 입력 2001년 3월 2일 18시 49분


◇거미줄, 아쿠타가와 우화집, 조양옥 옮김, 현대문학북스 펴냄

일본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芥川)상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유미리 현월 등 재일교포 작가들의 수상 소식으로 그 명성이 현태탄을 건너왔다.

하지만 그 주인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1892∼1927)의 이름은 낯설다. 일본영화 마니아 정도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羅生門) 원작자로 그를 기억할 것이다.

이 책은 일본 근대문학의 상징으로 꼽히는 아쿠타가와가 자살하기 전까지 남긴 100여편의 단편 중에서 동화적인 감수성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추려 모은 것이다. ‘성인우화’라는 꼬리표를 달았지만 요절한 천재작가가 보여주는 단편 미학의 정수를 감상하기에 부족함이 없어보인다.

대학 4학년 때 발표한 데뷔작으로 일본 문단의 대부인 나쓰메 소세키로부터 극찬받았던 ‘코’, 길지 않은 그의 전성기 때 처음 발표한 아동문학으로 그의 동화 중 최고로 꼽히는 ‘거미줄’, 세 아들을 두고 몽롱한 불안을 이유로 스스로 생을 끊는 운명을 예견한 것으로 전해진 ‘호랑이 이야기’ 등 14편이 실렸다.

작품마다 그가 독특한 시선과 섬세한 감수성으로 포착한 생에 대한 통찰이 서늘한 감동의 잔상을 오래도록 남긴다. 인간의 모순된 감정을 지적인 유희로 희롱하고 있는 ‘코’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입술까지 내려온 긴 코 때문에 시중의 웃음거리가 된 고승이 있었다. 정토 도량에 힘써야 할 승려 처지에 내색은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어느 날 코를 작게 만들 수 있는 비방을 안 그는 제자의 강권에 못 이기는 척 이를 실행한다.

평생 소원대로 코 크기는 줄어들었지만 행복감은 잠시 뿐이었다. 사람들이 달라진 그의 얼굴을 보고 더욱 웃음을 참지 못하자 불안감은 깊어졌다. 급기야 경솔한 행동을 원망하던 어느 날, 그의 코가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버렸다. 그는 ‘이제는 아무도 웃을 리 없다’며 안도한다.

눈 밝은 독자라면 고금과 동서를 구분하지 않는 인물과 무대, 묘사체 독백체 등 다양한 문체가 변주되는 자유분방함, 의식적으로 계산된 치밀한 구성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아쿠타가와식 글쓰기’ 묘미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라쇼몽’(1915)에서 정점에 올랐던 아쿠타가와 단편문학의 진면목은 마지막에 실린 ‘귤’에서도 엿보인다.

무료한 이등객차, 일을 찾아 고향을 떠나는 꽤죄죄한 여자아이, 보따리 속에 담아온 귤을 배웅나온 차창 밖 동생들에게 던져주며 아쉬워하는 모습…. 평범한 풍경을 불과 몇 페이지로 눈앞에 선한 감동의 현장으로 바꾸어 내는 비범함에서 그가 후대 문인들에게 끼쳤을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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