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교수의 법과 영화사이]<전사의 후예>

  • 입력 2001년 2월 27일 11시 14분


<전사의 후예 >(Once Were the Warriors) 1995

감독: Lee Tamahori

출연 Rena Owen (Beth), Temura Morrison (Jeke Heke)

원작:Alan Duff

지열이 높아 뱀이 살 수 없다. 뱀 뿐만이 아니라 땅 속을 주된 서식처로 삼는 짐승이 존재하지 않는다. 무일조(無翼鳥)의 보금자리, 새도 굳이 날 필요가 없는 지상의 낙원, 뉴질랜드에도 역사가 던진 암울한 그늘이 있다. 그것은 정복으로 건설한 신세계의 백인문명의 암영(暗影)이기도 하다.

뉴질랜드 영화, '전사의 후예(Once the Warriors)'는 유럽인에 앞서 이 땅에 뿌리내렸던 선주민(先住民) 마오리 족의 이야기다. 호주에 이어 영국인에 의해 개척된 뉴질랜드의 역사는 비교적 단순하다. 1840년, 이 땅에 먼저 이주했던 폴리네시아인 마오리 부족들과 영국정부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었다. 대학원 수준의 국제법 강의에 이따금씩 등장하는 "와이탕이 조약"(Waitangi Treaty)이다. 1858년, 최초로 부족족장들 중에 국왕이 선출되어 영국정부와의 관계를 조정한다. 일부 부족이 노골적으로 영국의 입장을 지지했고 결과적으로 부족간의 내분을 조장했다. 뉴질랜드가 영국에서 독립한 후에 마오리 문제는 뉴질랜드 내부의 문제로 격하되었다.

영화의 원작, Alan Duff의 "Maori, the Crisis and the Challenge" (1990)는 출판과 동시에 베스트 셀러의 반열에 올랐고 국내외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키위와 양떼, 휴화산과 협곡이 한적하게 춤추면서 여행자에게 더 없는 평화의 안도감을 선사하는 뉴질랜드 사회의 뒷골목을 조명하는 작품이다.

일찍이 한국출신 지식인, 윤홍기 교수는 '마오리 마음, 마오리 땅' (1986)이라는 문화에세이집으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Maori Mind , Maori Land, Essays on the Cultural Geography of the Maori People from Outside . Peter Lang. 1986) 25년째 뉴질랜드 제1의 대학, 오클랜드(Auckland) 대학의 지리학 교수로 재직중인 그는 비행기 아래로 처음 뉴질랜드 땅을 대면할 때의 감상을 이렇게 적고 있다.

"지천으로 퍼진 '진짜' 녹색의 천 위로 낱 톨의 쌀알들이 꼬물거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양떼들이었다. 녹색은 논, 흰색은 백미(白米) - 그것이 쌀의 땅에서 자란 "문화적 편견"의 원천이었다. 그는 이러한 외지인의 편견을 '문화적 조경'(cultural landscap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땅을 떠나면 마음은 유랑한다". "땅과 경관이 사회적 텍스트"(landscape as text)라는 그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심성은 그를 키운 땅에서 배태되는 것이다.

마오리의 문화와 언어를 재료로 빚어낸 윤교수의 이론을 이 영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카메라는 대도시의 빈민가를 조명한다. 이어 각도를 돌려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행렬을 조명한다. 자동차 불빛 따라 소음이 함께 춤춘다. 조상의 땅을 버리고 도시빈민으로 전락한 마오리족의 실상이다.

마오리족 여인, 베스는 전사계급의 후예이다. 인종 동화정책에 따라 도회지에 이주하여 정부에서 제공하는 생계보조금으로 연명하고 있다. 남편은 전형적인 마오리 사내처럼 술과 도박, 건달 짓거리와 싸움 그리고 아내구타로 무료한 세월을 죽인다. 친구 앞에서 체통을 세워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내를 구타하는 것도 가장의 정당한 체벌권의 범위 내에 속한다. 세월을 잘 못 만난 '사나이'일수록 가정 내에서는 절대권력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가장의 미덕이다.

아이들도 백인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 "왜 세상은 온통 검정 색인가? 무지개에는 왜 내가 보는 검은 색이 없나?" 어린 눈에 비친 세상의 빛깔이다. 큰아들은 갱 단에 가입하고, 작은아들은 절도범으로 소년원 신세다. 아비의 행태가 못마땅하기 짝이 없지만 아들 된 도리로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탈선만이 유일한 반항의 수단이다. 전사였던 조상의 위용을 문신을 통해서나마 전수 받으려는 청년건달이나 남의 자동차를 터는 소년이나 매 한가지다. 탁구공처럼 팽팽한 젊은 심신을 잡아둘 직장도 학교도 없는 그들에게는 지루한 일상을 넘길 도락이 없다.

그나마 엷은 희망의 등불은 열 세 살 짜리 딸아이다. 마오리 여인의 고귀한 심성을 지닌 그녀에겐 순정의 연인이 있다. "언젠가 자동차를 수리해서 함께 달려가자." 폐차 속에서 어린 연인은 무지개를 그린다. 그러나 그 딸아이마저 아비의 친구에게 강간당한 후에 자살한다. 모든 게 끝장이다.

그러나 망막한 절망을 딛고 베스는 일어선다. 찬란한 전사였던 조상의 자긍심을 되찾아야만 한다. 그 자긍심은 산과 물을 앗긴 아스팔트 위에서는 되살아 날 수가 없다. 딸을 고향 땅에 묻고 난 베스는 감연히 오랜 굴종의 세월을 마감한다. 18년 동안 가장의 이름으로 폭력을 휘둘렀던 남편에게 결별을 고한다.

"가슴속에 마오리의 문신을 새겨"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아이들이 함께 나선다. 영화는 고래고래 악쓰는 사내를 뒤에 두고 베스가 아이들을 이끌고 마오리 땅으로 귀환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다양한 인종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을 이루기는 쉽지 않다. 영화는 물질문명이 이룩한 합리의 왕국이라는 주류사회에 동화(assimilation)하는 것만이 절대빈곤을 벗어나는 첩경이라는 백인의 주장을 반박하는 원작의 메시지를 충실히 전한다. 산과 땅, 물을 잃은 사람, 감태준의 시구대로 '헛디딘 곳, 서울'에 사는 실향민은 작품이 남긴 여진을 주체하기 힘들어 윤홍기의 책을 다시 펴들게 된다. 키위를 닮아 머리털마저 빠져간다는 그가 쓴 모국어 시집을 읽고 싶다. 아직 접하지 못한 호주판 이 영화의 후속편 (What Becomes of the Broken Hearted (1999)은 그의 이론을 어떻게 접목시켰는지도 함께 확인하고 싶다.

<서울대 법대 교수>

ahnkw@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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