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충식/'낮은 데' 향한 생각

  • 입력 2001년 2월 19일 18시 58분


88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이 지긋한 신사가 가게 점원에게 수표를 내밀었다. 노신사는 아이들에게 나누어줄 몇 가지 선물을 사던 참이었다. 점원이 신분증과 주소를 물었다. 신사는 머뭇거렸다. 신분증이 없고 주소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쩔쩔매는 신사를 지켜보던 옆 사람이 구스타프 국왕임을 알아보았다. 점원에게 그것을 설명해 주었다.

▷점원은 그래도 신분증을 확인하고 주소를 적어야 한다고 우겼다. 수표를 쓰는 규칙대로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옆 사람은 크로네 지폐를 꺼내 보였다. 도안에 그려진 인물이 바로 구스타프 국왕이 아니냐고. 그러자 점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주소란을 비워둘 수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몇 푼어치의 거래는 답답하도록 길어졌다. 사회학자의 책에도 오른 실화다.

▷미국의 새 정부가 감세(減稅)공약을 지키기 위해 상속세를 없앤다고 하자 부자들이 들고 일어선다. 상속세라면 ‘부의 대물림’에 매기는 세금이니 빈털터리가 소동을 벌여야 마땅하다. 상속세가 없어지는 만큼 가난한 자에게 뜯어가야 할 테니까. 그런데 거꾸로다. 더욱이 헤지펀드의 거성 조지 소로스, 월가의 큰손 워런 버핏, 록펠러의 후손 데이비드 록펠러 같은 부호들이 데모(?)한다는 게 기이하다. ‘가난한 자를 희생시켜 갑부 자녀만 살찌울 것인가?’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라, 할아버지 아버지가 번 돈으로 사는 자가 나라를 좌지우지하게 할 것인가?’

▷우리 같으면 경실련 참여연대가 외칠 법한 구호들이다. 그러나 소로스씨를 비롯한 부호 120여명이 절절히 외친다. 위선인가 의심도 해 보지만 그도 아닌 것 같다. 상속세 유지를 위해 계속 신문 유료광고를 내겠다니까. ‘낮은 데’ 사는 빈자의 부담을 더는 사회, 노력해서 벌고 성공하게 하는 사회, 그것이 지향점이란다. 서울은 요즘 기득권과 개혁의 파열음으로 찢어질 듯하다. 높은 자리 사람들의 거드름과 호통, 거기에 맞서 ‘법질서를 지키라’는 저항으로 소란하다. ‘남을 행복하게 하지 못하고는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던 버나드 쇼의 한마디가 떠오른다.

<김충식 논설위원>seeschem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