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원재/전문경영인의 ‘비극’

  • 입력 2001년 2월 5일 18시 35분


대우그룹의 분식(粉飾)회계와 관련해 전직 대우계열사 사장들이 구속되는 모습을 지켜본 다른 그룹 현직 임원들은 착잡한 표정이었다.

올해 직장생활 21년째인 A이사는 “내가 그때, 그 자리에 있었다면 ‘목’을 내걸고 반대할 수 있었을지 자신이 없다”며 “남의 일 같지 않다”고 말했다. B상무는 “어느 ‘간 큰’ 월급쟁이 사장이 회장의 지시에 이의를 달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오너의 말 한마디가 법으로 통하던 시절이 아니던가. 그래서 이들은 동정론을 펴는 것이다.

전경련 김석중 상무는 “총수의 전횡을 제어할 제도적 장치가 미흡한 상황에서 당사자들에게 주어진 선택의 폭은 좁을 수밖에 없었다”며 “따지고 보면 이들도 잘못된 기업관행의 희생자”라고 주장했다.

외환위기 이후 황제식 재벌 경영의 폐해가 부각되면서 오너의 독단을 견제하고 경영과 회계의 투명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각종 법률이 개정됐다. 하지만 겉모양은 변했어도 전문경영인이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어김없이 오너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게 우리 기업의 여전한 현실이다.

경영권분쟁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던 현대아산 정몽헌 회장은 작년 말 복귀선언을 하면서 “외자유치와 같은 시급한 현안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니까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어 내가 다시 나섰다”고 말했다.

전임 대우 경영진이 김우중씨 비리의 공범으로서 실정법을 어긴 데 대해 처벌을 받는 건 당연하다. 자신이 이끈 기업의 부실로 국가경제에 엄청난 부담을 준 책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재계 인사들조차 “회사가 망가질 줄 알면서도 직언을 포기한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한다.

‘전문경영인의 비극’은 이번으로 끝나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에는 과연 오너의 부당한 지시에 단연코 ‘노(No)’라고 말할 전문 경영인이 있는가. 총수를 여전히 ‘제왕’으로 떠받드는 재벌 그룹의 행태가 온존하는 한 제2, 제3의 비극이 빚어질 개연성은 여전한 것 같다.

박원재<경제부>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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