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득헌의 스포츠 세상]카프리아티의 쓴맛과 단맛

  • 입력 2001년 1월 29일 18시 30분


“만일 이 약을 복용하면 부작용으로 5년 내에 죽는다는 사실을 알아도 이 약이 금메달을 보장한다면 복용할 것인가.” 1984년 올림픽을 앞두고 타임지는 세계 정상급 선수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다. ‘약물을 끊을 것인가, 인간을 포기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놀랍게도 선수들은 후자를 택했다. 198명의 선수 중 103명이 약물을 복용하겠다고 답했다.

물론 운동선수의 약물 복용은 선수의 의사와 관계없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면 1983년 구 소련에서 유출된 메모에는 ‘의학적 생물학적 실험의 희생자’들이라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24명이 포함된 59명의 명단이 적혀 있었는데, 조사 결과 그들의 평균수명은 41.5세로 나타났다. 하지만 타임지의 조사에도 나타났듯이 운동선수들은 고대 올림픽에서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약물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경기력을 향상시켜 더 좋은 기록과 승리를 하겠다는 욕망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스포츠 일탈로 불리는 약물 복용 같은 일은 그런 식으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지난주말 테니스 그랜드슬램 대회인 호주오픈 여자 단식결승을 기억할 만한 승부로 장식한 제니퍼 카프리아티의 얘기이다.

1990년 13세의 나이로 프로에 데뷔해 두 해 사이 윔블던대회, 프랑스오픈, 유에스오픈 4강에 이어 슈테피 그라프를 누르고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며 테니스 요정으로 각광받았던 카프리아티. 그가 왜 갑자기 반지를 훔치다 체포되고 급기야는 마약을 복용하다 재활센터에 보내지는 등 한동안 어둠 속을 헤맸을까. 경기력 상승 욕망 때문은 아닐 게다. 어린 나이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회적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이겨보겠다고 약물을 찾는 경우와 대비해보면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위대한 선수들이 의지로써 스포츠 정신을 구현했듯이 카프리아티도 결국 테니스에 대한 소망과 믿음으로 재기의 꽃망울을 터뜨렸다. 호주오픈에서 우승함으로써 7년 만에 랭킹 10위 안에 든 것, 12번 시드 선수로 1번 시드 힝기스 등을 제치고 우승함으로써 1978년 시드 배정을 받지 못하고도 우승한 크리스 오닐을 제외하고는 가장 낮은 시드 선수로 우승한 기록, 코치인 부친과의 포옹 등도 눈길을 끌었다. 그래도 내게 가장 남는 것은 일찍이 테니스 천재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코트에서 쫓겨나기도 했던 카프리아티가 24세에 빅 타이틀 홀더가 됐다는 점이다.

그의 우승에는 삶의 단맛, 쓴맛이 담겨진 느낌이기 때문이다. 천재성, 약물, 좌절, 욕망, 의지, 재기 등 여러 가지를 음미케 하는…. 스포츠는 우리 삶의 거울도 되고 지표도 된다는 생각이다.

<논설위원·체육학박사>dhy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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