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신간]왜 똘레랑스인가

  • 입력 2001년 1월 19일 19시 02분


◇왜 똘레랑스인가

필리프 사시에 지음 홍세화 옮김/255쪽 1만2000원 상형문자

동양과 서양을 비교하는 잣대 가운데 하나로 흔히 기독교와 유교가 지목된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기독교와 유교에 대한 흥미로운 대비를 제시한 바 있는데, 기독교가 ‘세계에 대한 지배’를 목표로 한 ‘긴장’의 종교라면, 유교는 ‘세계에 대한 적응’을 모색한 ‘타협’의 종교라는 것이다.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으나 베버의 눈에는 서양과 동양의 거리가 이렇게 보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을 보면 이런 견해는 그리 타당한 것 같지 않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의약분쟁으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이익집단 갈등을 지켜보면 조화, 협상, 상생(相生) 등은 한낱 구두선(口頭禪)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이익집단 간의 대립과 분쟁은 불가피하고 또 자연스러운 것이라 하더라도, 한치의 양보도 없이 진행되는 갈등의 양상들은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의 현실로 회의와 절망을 부추기고 있다.

이런 현실에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머리를 식히고 읽어 볼 만한 좋은 책이 나왔다. 프랑스 정치철학자 사시에가 최근 펴낸 ‘왜 똘레랑스인가’가 바로 그 책이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통해 똘레랑스란 말을 우리에게 소개한 바 있는 홍세화씨가 번역한 이 책은 똘레랑스 사상의 계보학을 탐색하고 현재적 의미를 반추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불어 똘레랑스(tol¤rance)는 원래 ‘견디다’ ‘참다’를 뜻하는 라틴어 ‘tolerare’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말. 이 말은 지난 5세기 동안 그 의미가 계속 확장돼 왔는데, 초기에는 기독교에 대한 군주의 개방적인 태도를 지칭했지만, 18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인간관계의 바람직한 방식, 즉 내가 동의하지 않는 생각을 용인하는 것까지를 포함하게 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똘레랑스 사상은 질서의 논리에 의해, 유용성의 필요에 의해, 그리고 자유의 요구에 의해 역사적으로 정당화돼 왔다. 이 가운데 특히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 바일, 로크는 똘레랑스 사상의 기초를 세우는 데 중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들의 견해를 포함한 일련의 논의들은 똘레랑스 사상의 내용을 풍성하게 만들어 왔다.

이 책의 가장 커다란 미덕은 똘레랑스 사상에 대한 저자의 종횡무진한 분석에 있다. 르네상스시대의 에라스무스에서 최근의 마르쿠제, 하이예크, 아탈리에 이르기까지 똘레랑스를 어떻게 이해하고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진행된 장구한 토론을 매우 간결하게 정리하고 있는 점은 특히 돋보인다. 서구 근대사상 하면 으레 독일 관념론이나 영국 경험론 또는 마르크스주의를 떠올리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서구 사회사상의 또다른 일면이라 할 수 있는 관용과 타협의 ‘현실감각’을 적극 계몽하는 장점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아쉬움도 있다. 그것은 책 전체를 관류하는 다원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현실의 다양한 그늘인 정치적 억압,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배제를 어디까지 똘레랑스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남아 있다.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똘레랑스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앵똘레랑스(불관용)할 것을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용과 불관용의 경계를 확정짓기란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다. 현실에 회의하면서도 결국 현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책을 읽다보면 역자의 유려한 번역 솜씨가 이 책이 번역서라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게 한다.

김 호 기(연세대 교수·사회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