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의 책·사람·세상]출판의 경계 넘나드는 팔방미인들

  • 입력 2001년 1월 19일 18시 41분


과학교양도서 및 SF 작가로 일컬어지는 아이작 아시모프(1920∼1992)는 평생 500권 이상의 책을 집필, 출간했다. 그런 그가 지니고 있는 세계 유일의 기록 하나가 있다. 그는 가장 널리 통용되는 도서분류법인 듀이 십진분류법 체계의 모든 분류 항목 안에 자신의 저서가 포함되어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정상급의 역사학자인 에릭 홉스봄은 런던 버벡크 칼리지의 전임강사가 될 무렵인 1959년 프란시스 뉴턴이라는 필명으로 ‘The Jazz Scene’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재즈의 사회사, 특히 재즈의 저항적 성격을 논하는 훌륭한 책으로 평가받아 왔다. 또한 홉스봄이 나중에 여러 잡지에 기고한 재즈 관련 글들이 추가되어 1993년 홉스봄 본명으로 다시 출간되기도 했다.

영남대 법대 박홍규 교수의 번역 및 저술 목록에는 급진적 환경사상가 머레이 북친, 영국의 진보적 사상가 윌리엄 모리스, 만화가 오노레 도미에 등의 이름을 볼 수 있다. 물론 박 교수는 법학자로서의 본연에 충실한 법학 도서들도 여러 권 집필, 출간한 바 있다.

독일에서 독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우석대 김두규 교수는 풍수학에 대한 저서를 여러 권 출간한 바 있다. 김 교수는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가학으로 한학과 풍수학을 익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저술가들을 향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어리석은 질문이 될 것이다. 도대체 저술가로서 당신의 정체성이 무엇이냐? 본연에서 벗어난 외도가 아니냐? 물론 저술을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본래의 자리가 중요하기는 하다. 팔방미인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꾸준히 한 우물을 파는 일방미인의 아름다움을 능가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도서분류체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저술 활동, 공식적인 직함 또는 지위와 상관없어 보이는 저술 활동은 다만 저술 결과의 질적 수준으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학문의 전통적인 경계를 넘나드는 학제적인 태도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저술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외도 또는 일종의 퓨전화는 그것이 생산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한 질책보다는 격려가 바람직하다.

재즈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들 가운데 하나인 루이 암스트롱(1901∼1971)이 누군가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 장르가 무엇입니까?” 우문에 대한 암스트롱의 현답이 이어졌다. “음악 장르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들어서 좋은 음악과 그렇지 않은 음악. 나는 내가 들어서 좋은 음악을 좋아한다.”

표정훈(출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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