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고승철/‘야생 호랑이’를 보고 싶다

  • 입력 2001년 1월 11일 18시 57분


동물원의 터줏대감 호랑이를 정글에 내놓아 보자. 먹이를 제 힘으로 잡을 수 있을까. 한국의 기업을 이끌어 가는 최고경영자(CEO·Chief Executive Officer) 가운데 상당수는 이런 ‘무늬만 호랑이’다.

미국을 보자. 기업들은 유능한 CEO를 구하기 위해 뜨거운 쟁탈전을 벌인다. CEO를 잘 들이면 바로 회사 주가가 폭등하기도 한다. 이런 CEO는 엄청난 몸값을 받고 이적한다. 연봉이 수백만달러에 이르는 그들은 몸값을 더욱 높이기 위해 경영실적을 올리려고 온몸을 던진다. 경영난에 빠진 기업들은 난국타개책으로 외부에서 CEO를 구하는 경우가 많다. IBM도 그랬다. IBM의 CEO인 루 거스너는 과자회사인 나비스코 사장을 하던 사람이었다. 컴퓨터 회사인 IBM과는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나비스코를 잘 이끌어간 공적이 돋보여 스카우트됐다. 칼리 피오리나(여)가 휴렛팩커드(HP)의 CEO로 영입되자 HP의 주가가 크게 올랐다. 그만큼 그의 경영능력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한국은 어떤가. 삼성 현대 LG SK 등 대그룹 계열사의 CEO는 대부분이 그 그룹 출신들이다. 외부 조직에서 들어온 CEO는 찾기 어렵다. 어느 그룹에 입사해서 CEO로까지 승진하려면 산전수전을 다 겪어야 한다. 한국적 상황에서 이 자리에까지 오르려면 총수의 눈에 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적잖은 CEO들은 이른바 ‘가신(家臣)’ 인사들이다. 그들은 총수의 이익을 위해 몸을 던져 봉사한 인물이 아닌가. 태생적 한계를 지닌 이들이 CEO로서 기업의 여러 이해관계자들(stakeholders)의 이익을 골고루 대변할 수 있을까.

CEO라는 말이 널리 쓰인 것은 불과 몇 년 사이다. 우두머리(Chief)라는 접두어가 붙은 것은 기업이 전쟁상황에 처한 것을 가정한 것이다.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이는 기업세계에서 CEO는 전략사령관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요즘 ‘경영’이란 말 앞에 ‘전략’을 붙여 ‘전략 경영’이라고 하는 것도 그만큼 기업경쟁이 전쟁을 방불케 한다는 뜻이리라.

미국이나 유럽의 CEO들은 대체로 정글에서 살아남아 혁혁한 공을 세운 ‘야생(野生)호랑이’다. 짐승을 잡을 능력을 지녔기에 이들은 다른 기업으로 가서도 제 실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룹이라는 동물원 안에서 자란 ‘무늬만 호랑이’인 CEO가 수두룩하다.

총수의 비위만 맞추는 내시(內侍)형 CEO도 한둘이 아니다. 어느 재계 인사는 “탈세, 편법상속 등 비리를 많이 저지른 총수는 이런 비밀스러운 실무작업을 맡은 부하를 발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한국적 현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곧 상장회사들의 주총이 줄지어 열리는 시즌이 온다. 그룹의 경계를 넘어 발탁된 CEO를 보고 싶다. 예를 들어 LG에서 잔뼈를 키운 경영인이 삼성이나 SK에 괜찮은 몸값을 받고 스카우트되는 이변이 생겼으면 좋겠다. 총수의 눈치에 연연하지 않는 CEO가 투명경영을 해야 그 기업의 가치가 올라간다. 한국에도 진정한 ‘CEO 시장’이 형성되길 기대해 본다.

고승철<경제부장>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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