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인터뷰]박중훈 "모든 건 한국영화 덕분입니다"

  • 입력 2001년 1월 11일 18시 14분


그는 많이 까칠해져 있었다. 1월11일 오후 1시 프라자호텔에서 기습 인터뷰를 가진 박중훈은 좋은 소식을 발표하는 사람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문을 열었다.

"현재 출연중인 영화 <세이 예스>에서 연쇄살인범 역을 맡고 있어 어쩔 수 없이 수염 기른 까칠한 모습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됐습니다."

<세이 예스> 촬영을 하다말고 이렇듯 갑자기 온 동네(?) 기자들을 불러모은 이유는 <양들의 침묵> <필라델피아> 등을 연출했던 조나단 드미 감독의 신작 'The Truth about Charlie'에 주연급 배우로 캐스팅됐기 때문. 지난 선댄스 영화제에서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본 조나단 드미 감독이 먼저 박중훈에게 프로포즈해 온 것을 계기로 이번 할리우드 진출이 이루어지게 됐다.

따지고 보면 박중훈이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4년 전 <아메리칸 드래곤>이라는 액션 영화로 그는 이미 할리우드에 진출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메리칸 드래곤>은 적은 돈으로 만들어진 B급 액션영화였고 수익도 별 볼일 없었다.

그에 비해 'The Truth about Charlie'는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에 빛나는 조나단 드미 감독과 할리우드의 내로라 하는 스타들이 함께 참여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일단 믿음이 가는 프로젝트다.

그는 기쁘고 흥분된 마음을 애써 누그러뜨리며 이번 할리우드 진출에 관한 소감과 앞으로의 계획을 차분히 설명했다.

"한국영화가 나를 키웠다. 이번 할리우드 진출은 결코 나만 잘나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라고 강조한 그는 역시 프로답게 겸손함의 미덕을 보여주었다. 애써 자신을 낮출 줄도 알고 적당히 자랑할 줄도 알았다. 프로배우 박중훈, 그와 나눈 인터뷰 내용을 전한다.

어떻게 이번 영화에 출연하게 됐나?

-지난 12월초 이명세 감독을 통해 먼저 연락을 받았다. 조나단 드미 감독이 나를 캐스팅하고 싶어한다고. 이 감독은 "조나단 드미 감독이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무려 3번이나 봤으며 연출자에 대한 관심만큼 박중훈이란 배우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고 전해주었다. 나 역시 그 제안이 마음에 들어 12월22일 이 영화의 로케지인 파리에서 감독 및 프로듀서와 만나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이 자리에서 출연료 및 배역에 대한 구두합의를 마쳤으며 현재 양측 변호사가 구두 합의 내용을 토대로 계약서를 작성중이다. 난 이제 계약서에 사인하는 일만 남았다.

할리우드 메인 스트림에 진출한 소감은?

-미국 영화에 출연한다는 사실 때문에 흥분되는 건 아니다. 개인적으로 <양들의 침묵>이나 <필라델피아> 등을 통해 감독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었고 그 믿음 때문에 이번 할리우드 진출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조나단 드미 감독이 <양들의 침묵>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을 때 흥분해서 말을 자꾸 더듬던 것이 인상에 많이 남았는데 만나보니 그는 실제로도 그런 사람이었다. 말을 더듬고 흥분도 아주 잘했다(웃음).

현재 출연중인 <세이 예스>의 촬영 스케줄과 이 영화의 스케줄이 겹치진 않나?

-다행히 <세이 예스> 촬영은 3월초쯤 마무리될 것 같다. 조나단 드미 감독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The Truth about Charlie'만큼 <세이 예스>도 내겐 정말 중요한 영화다. 이 영화 촬영에 절대 지장을 주고 싶지 않다"고 말했고 그도 내 말에 수긍해주었다. 'The Truth about Charlie' 촬영중에라도 <세이 예스>의 보충녹음 및 홍보 등을 위해 일시 귀국할 것을 약속 받았다.

언어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생각인가?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지 않은 이상 네이티브 스피커의 발음과 억양을 따라가기엔 분명 한계가 있다. 아놀드 슈왈츠네거나 안토니오 반데라스, 성룡, 주윤발 등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노력해도 미국인들의 발음을 따라갈 순 없다. 근데 영어권 영화를 몇 번 찍어보니 문제는 발음이나 억양이 아니더라. 그건 연습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이고 진짜 중요한 문제는 "스태프 및 감독과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하게 할 수 있는가", "상대 배우의 대사를 알아들을 수 있는가"였다. 다행히 내가 맡은 역할은 한국계 미국인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을 듯하다. 이 영화에서 마크 왈버그는 수 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특수요원으로 등장하는데 그가 구사하는 한국어 대사도 5~6개 정도 된다. 자랑같아서 낯간지럽긴 하지만 뉴욕에서 2년간 공부하며 영어에 대한 친밀감을 익혀놓았던 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흔히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는 아시아 배우들은 잠깐 등장했다 사라지거나 악역을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난 동양 남자가 할리우드 영화에서 제일 불쌍하게 취급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작해야 흰 러닝셔츠 걸치고 과일 배달을 하거나 검은 운동복 입고 발 차기를 하거나 칼 맞아 죽는 역할이 대부분이다. 남미 남자는 열정적이고 남미 여자는 섹시하며 동양여자는 신비롭기라도 한데 동양남자는 정말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내 역할이 그런 것이었다면 아무리 할리우드 영화라도 이 영화에 욕심을 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맡은 배역은 이 영화 총 촬영분량의 약 50% 정도 되고 출연분량 서열로 따지면 공동 3,4위 정도다. 악역도 아니고 잠깐 나왔다가 금세 사라지는 역할도 절대 아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좀 낭만적으로 말하면 난 85년 영화사 사무실 청소하는 일부터 시작해 이 자리까지 왔다. 한국영화는 내게 많은 걸 주었고 숙제를 남겼으며 많은 걸 앗아가기도 했다. 흥분하긴 아직 이르지만 이렇듯 큰 무대에 서게 된 건 전적으로 세계 속에 부쩍 성장한 한국영화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가까이는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멀리는 90년대 이후 크게 약진한 한국영화 덕분이다. 난 한국영화에 정말 감사한다.

황희연 기자 <동아닷컴 기자>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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