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처칠과 세 의원

  • 입력 2001년 1월 6일 19시 50분


기본질서에 반기를 드는 것은 세상 이치에 거역하는 것이라는 뜻의 ‘조반역리(造反逆理)’를 송년휘호로 남겼던 김종필(金鍾泌·JP) 자민련명예총재가 5일 ‘DJP 공조(共助)’를 선언했다. JP는 지난해 4·13 총선 직전 시민단체의 낙선운동 대상에 자신이 포함되자 그 배후에 민주당측의 음모가 있지 않느냐며 공조를 파기했다. 당시 JP가 인용했던 ‘조반유리’(造反有理·반기를 드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에서 ‘조반역리’까지 9개월이 걸린 셈이다.

“이 정권이 잘 되도록 총력을 기울여 협력하겠다”는 JP의 공조선언으로 정국은 다시 ‘2여(與) 1야(野)의 대결구도’로 치닫게 됐다. 내각제를 통한 권력분점이 본질이던 ‘DJP 공조’가 ‘자민련 국회교섭단체 만들어주기’로 변질되면서 빚어진 결과다.

현재의 정국 악화를 부른 ‘민주당 세 의원 꿔주기’는 무슨 변명을 하더라도 민의(民意)를 배반한 ‘정치적 야합’이 아닌가. 결국 자민련 부총재인 강창희(姜昌熙)의원의 반발과 제명으로 자민련 교섭단체 만들어주기는 무위로 돌아가고 여야(與野)의 극한대결로 국정의 불안감만 심화됐다.

이번 사태의 근본책임은 결국 ‘정도(正道)의 정치’가 아닌 ‘술수의 정치’에 의존한 DJP에 있다. 그러나 김대중(金大中·DJ)대통령은 ‘의원 꿔주기’를 ‘넓은 의미의 정도정치’라고 강변하고, JP는 한술 더 떠 의원 이적(移籍)을 비판하는 언론을 비난한다. “영국의 처칠 총리도 당적을 옮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라며 처칠이나 이번에 민주당에서 자민련으로 옮겨간 세 의원이나 당을 옮기기는 마찬가지라는 논리를 내세운다.

1900년 영국 보수당 하원의원이 된 윈스턴 처칠은 4년 후 보수당의 보호관세정책에 반대해 자유당으로 옮겼다가 1차 세계대전 후인 1921년 노동운동에 대한 우려 등으로 보수당으로 돌아갔다. 모두 정치인으로서 철저한 자기신념과 정책적 판단에 따른 이적이었다.

JP가 옹호한 세 의원도 물론 ‘소신 이적’을 주장한다. 그러나 DJ는 4일 여야 영수회담에서 “야당이 내일이라도 국회법을 표결로 통과시킨다면 (자민련에 입당한) 세 명을 데려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세 의원의 ‘소신 이적’이 무색한 소리다. 이런데도 JP가 세 의원의 경우와 처칠을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어설픈 지식과 궤변이 낳은 우환(憂患)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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