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패자가 되어 맞는 새해

  • 입력 2001년 1월 5일 18시 33분


새해 벽두에 내다보는 일년은 늘 그렇듯이 미래와 희망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뒤를 돌아보면 회한으로 점철된 과거가 있다. 과오를 되풀이하면서도 인간은 습관처럼 또다시 달력의 날짜에 맞춰 갖가지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다짐 속에 출발선을 나선다.

후회의 종류만 달라질 뿐 절대량은 비슷할 또 다른 한 해를 반복 생산하기 위한 ‘힘찬’ 발걸음은 모두의 직장과 가정에서 시작됐다. 새해 벽두부터 너무 자조적이라고 핀잔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작년 말에 일어났던 경제 관련 해프닝들을 돌이켜보면 앞날에 대한 기대는 부질없어 보인다.

▼금융파업 당사자 모두 패배▼

우선 지난해 말 동토(冬土)에서 벌어졌던 금융노조의 동투(冬鬪)는 철저하게 모든 당사자를 패자(敗者)로 만든 게임이었다. “10월중 초우량은행이 가시화될 것”이라고 큰소리치던 진념 재정경제부장관과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이 겸연쩍은 나머지 해를 넘기기 전에 서둘러 모양이라도 갖추자고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파업대책도 없이 내놓은 국민 주택 두 은행의 합병발표 후유증으로 정부와 은행경영진의 리더십은 그 허구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 사건으로 금융노조는 생존 자체를 잃을 위기에 처했지만 역시 가장 큰 패자는 정부와 은행의 무대책 때문에 그렇게 극심한 혼란과 불편을 겪어야 했던 은행고객, 즉 국민이었다. 농성을 해산시킨 것이 정부가 아니라 여론이었다는 점에서 당국도 우쭐댈 일이 결코 아니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해서 정부가 말하는 ‘초우량은행’이 태어난다는 보장만 있으면 참을 수 있다. 소매금융의 국민은행과 주택금융을 하는 주택은행은 기업금융을 거의 해 본 적이 없는 은행들이다. 심하게 말하자면 과거 산업자금을 취급하지 않았던 덕에 기업관련 부실채권을 면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상대적으로 우량 소리를 듣는 은행이 됐을 뿐이다. 정부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그런 소매금융만으로 세계적 우량은행이 된 사례를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국민은 또다시 패자가 될까 걱정이다.

국회 예산문제도 그렇다. 우여곡절 끝에 이른바 여야 총무 합의라는 봉합과정을 통해 올해 예산안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불행하게도 예년처럼 국회가 예산을 항목별로 삭감한 것이 아니고 삭감규모만 정해준 채 항목별 삭감 권한을 정부에 내주는 해괴한 일을 저지름으로써 여야는 모두 스스로 패자의 길을 선택했다. 그러려면 예산심의는 왜 했는가.

세상에 이런 예가 또 있을지 모르지만 심지어 국회는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무슨 명분으로든지 추경예산을 편성할 수 있도록 하는 기이한 권한을 정부에 헌납했다. 본예산을 심의하면서 추경을 맘대로 할 수 있게 했다면 그게 무슨 예산인가. 여기서도 세금을 내는 국민은 가장 불쌍한 패자가 됐다. 그런 문제들은 물론 국민에게 상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해 말 국회를 통과한 말썽 많은 공적자금도 그 속을 뜯어보면 국민이 실상을 모르고 지내온 게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해 준다. 한나라당의 이한구(李漢久)의원은 예산심의 과정에서 공적자금이 얼마나 허술하게 취급되고 있는지를 알고 기가 막혔다고 한다. 자금을 조성 배분 관리 회수하는 총괄적인 조직이 정부내에 없고 나눠주는 기준도, 결정권도 들쭉날쭉하다. 이렇다 보니 세간에서는 누구한테 부탁하면 잘 된다는 식의 루머까지 나돌고 있는 게 현실이다. 여기서도 공적자금을 갚아야 할 주체인 국민은 역시 패자의 자리로 밀렸다.

그나마 워크아웃 기업에서 부실이 더 발생하면(분명히 발생하겠지만) 이 정도의 공적자금으로는 금융정상화를 결코 이룰 수 없을 것이라는 예고가 바로 관변 연구기관인 금융연구원에서 나오고 있으니 우리의 앞날을 어떻게 희망을 갖고 볼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식으로 또 한해 보낼텐가▼

은행합병은 실작업이 올해 이뤄지고 국회의 여야 총무합의는 그 대상이 금년도 예산과 관련된 사항이다. 그리고 공적자금은 이제 막 투입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들 현안에 관한 한 지난해와 올해를 물리적으로 단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작년에 빗나간 결정의 결과가 고스란히 올해로 이월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연초부터 국민은 맥이 빠진다.

이런 식으로 또 한 해를 지내면 우리는 내년 초 똑같은 회한의 감정으로 올해를 돌아볼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국민이 승자가 되어 맞는 새해는 언제쯤 올 것인가.

이규민<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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