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교수의 법과 영화사이]34번가의 기적

  • 입력 2000년 12월 25일 19시 30분


<34번가의 기적>(1994, 감독: Les Mayfield)

‘신은 죽었다!’

과학과 이성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인간은 오만 방자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와 가치를 부정하면서 오로지 현실적 이해타산만을 추구하는 속물로 전락했다. 영화 ‘34번가의 기적’은 이렇듯 타락한 인간에 대한 경종이다.

환상과 신비의 세계를 뒤로하고 이성의 세계로 진입하는 어린이의 성장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케 하는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은 미국사회에 깊이 뿌리박은 종교적 전통과 헌법숭배 사상을 전달하는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반세기 전에 선보인 이 작품(1947년)이 20세기말에 재탄생한 것은 이러한 전통에 힘입은 것이다.

여섯살 짜리 소녀 수전은 이미 이 세상에 산타할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밀’을 알고 있다. 이성을 신봉하는 엄마, 워커부인의 가정교육이 그녀의 조숙을 촉진한 것이다. 사내에게 버림받은 어두운 과거를 딛고 일어서려는 워커는 어린 딸에게 환상보다 냉정한 현실을 가르친다.

그녀가 일하는 코울 백화점은 뉴욕시의 중심, 34번가에 자리잡고 있다. 이 백화점의 연례행사인 산타가 지휘하는 시가지 행진은 전 뉴욕시민의 볼거리이다. 그런데 행사직전에 산타 역을 맡을 점원이 술을 마시고 다치는 사고가 발생한다. 책임자인 워커는 현장에서 산타의 신성함을 강론하던 크링클 노인을 임시 대타로 기용한다. 흰 턱수염과 인자한 외모가 산타로서 적격이다.

크링클의 채용으로 백화점의 매상이 치솟는다. 자신이 진짜 산타라고 믿는 크링클의 진지하고도 양심적인 언행이 어린이들과 부모들을 몰고 온 것이다.

길 건너편에 자리잡은 경쟁사는 크링클 때문에 해고당한 주정뱅이를 매수하여 크링클의 파멸과 코울 백화점의 명예실추를 도모한다. 덫에 걸린 노인은 폭행으로 체포되고 자신이 산타라는 주장을 펴자 정신병원에 감금된다.

그동안 이성과 과학의 세계를 고집하던 워커가 새로운 깨달음에 도달한다. 딸 수전과 남자친구 베드포드변호사의 경건한 사랑에 감화된 것이다. 워커는 상업적 타산으로 노인을 버리려는 백화점 간부들을 설득하여 “우리는 산타의 존재를 믿는다”는 캠페인을 벌여 크링클의 구명운동에 나선다.

재판이 열린다. 여러 가지 따뜻한 ‘인간애’가 담긴 증거에도 불구하고 과학과 이성에 기초하여 판결을 내려야 할 판사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크링클에게 패소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판결 직전에 기적이 일어난다. 수전은 크리스마스 카드와 함께 1달러 지폐를 판사에게 건네준다. “우리는 신을 믿는다”라고 선명하게 찍혀 있다.

깨우침을 얻은 판사는 연방정부의 ‘공식 입장’을 근거로 산타의 존재를 인정하고 크링클을 석방한다. 거리, 가게, 집집마다 모든 시민이 환호한다. 과학과 이성의 시대일수록 인간의 삶에 경건한 신비로움이 필요한 것이다.

안경환(서울대 법대 교수)ahnkw@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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