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타워]"재벌정책 오락가락…기업만 멍든다"

  • 입력 2000년 12월 18일 18시 41분


공정거래위원회가 4대 그룹의 부당내부거래 조사 결과를 발표한 14일, 해당 그룹들은 묘한 반응을 보였다. 하나같이 “승복할 수 없다”며 불만을 나타냈지만 그런 와중에도 공정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A그룹 구조조정본부 임원은 “재심을 ‘정중하게’ 요구하겠다”고 말했다. 이의를 제기하기는 하되 이 과정에서 정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용어선택까지 각별히 신경을 쓴 것.

연말을 맞아 정부가 재벌을 겨냥해 다시 강공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기업들은 “정부의 재벌정책이 어떤 목적을 염두에 두고, 어떤 원칙에 따라 이뤄지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재벌정책에 대한 기업들의 반발논리▼

항 목반발 이유
편한 대로 입장 뒤집기부실 계열사 지원 유도 → 뒤늦게 부당거래 판정/과징금 부과
‘겉따로 속따로’ 행태 구조조정본부 실체 인정/자료제출 등 업무협조 요구 →단속방침 공표, 해체 요구
오너경영 말 바꾸기 현대 등 총수 일선퇴진 압박 → 문제 생기면 오너책임, 사태해결 주문/경영복귀 용인
주요 결정 눈치보기 IMT-2000, 생보 상장 등 미온적 처리 → 기업 혼선
오락가락 정책 벤처붐 조성 위해 대기업 투자 분위기 유도 → 부당내부거래로 제재
예측 가능한 정책 나와야재벌 비리집단 매도는 나라경제 도움 안돼

▽오락가락 정책 “기업만 헷갈린다”〓삼성카드와 삼성캐피탈은 작년 9월 계열사인 삼성상용차가 유상증자할 때 발생한 실권주를 순자산가치보다 125억원 비싼 가격에 인수했다. 이는 자금난에 빠진 기업을 형편이 좋은 금융 계열사가 지원한 전형적인 내부지원 모델. 공정위는 이번에 이 행위를 부당거래로 판정해 과징금을 매겼다.

삼성측은 “상용차를 그대로 놔뒀다면 부도로 이어졌을 텐데 당시 상황에서 그게 가능했겠느냐”며 “채권단은 물론 정부측과도 암묵적인 공감대가 이뤄진 일을 뒤늦게 문제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벤처가 우리 경제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관심을 끌 무렵, 경제장관들은 “투자여력이 있는 대기업들이 나서야 한다”며 독려했다. 주요 그룹들은 자회사 분사나 지분인수 등을 통해 벤처투자 규모를 늘렸다. 벤처 붐이 시들해지자 대기업의 벤처투자는 ‘응징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부당내부거래 조사에서는 어김없이 위장 벤처계열사가 문제가 됐다.

전경련 이승철 기획본부장은 “이 지침을 따르자니 저쪽에서 위법이라고 몽둥이를 들고, 저쪽 입장을 존중하자니 다른 편에서 눈을 흘기는 격”이라며 “정부부터 일관성을 지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겉 따로 속 따로 “어느 쪽이 진짜?”〓정부가 지난 주말 재벌 구조조정본부의 월권 단속방침을 밝히자 재계는 갑자기 ‘구조본’이 표적이 된 배경을 파악하느라 촉각을 곤두세웠다.

B그룹 임원은 “결합재무제표 등 각종 자료제출을 요구하거나 업무협조 부탁을 할 때 구조본을 창구로 이용하면서겉으로는 해체돼야 한다고 윽박지르는 것은 이중적 행태”라고 비판했다.

현대사태 때 ‘정씨 일가’의 퇴진을 요구했다가 사태가 꼬이자 정부가 앞장서서 대주주 개입을 요구한 것도 같은 맥락. 5월말 정부 압력에 못이겨 퇴진한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은 현대건설 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경영 일선에 복귀할 여건을 갖췄다. 전문경영인 제도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사고가 터지면 오너에게 수습책임을 떠넘기는 정부의 이율배반적인 태도가 한몫했다는 지적이다.

▽정부가 중심 잡아야〓재계는 내년 대내외 경제여건이 극도로 불투명한 만큼 정책이 기업 의욕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추진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유기업원 김정호 부원장은 “재벌이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면 법에 따라 엄중히 처리해야 하지만 앞에서는 원칙을 강조하면서 뒤에서는 탈법을 은근히 조장하는 자기모순적 행태는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원재기자>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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