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고승철/칸트와 오리너구리

  • 입력 2000년 11월 19일 18시 36분


‘칸트와 오리너구리.’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가 지난해 펴낸 책 제목이다.

제목만 보면 말랑말랑한 소설책 같지만 사람 마음과 언어의 관계를 따진 딱딱한 이론서다. 에코는 ‘장미의 이름’ ‘푸코의 추’ 등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써서 돈방석에 앉은 인물이기도 하다.

독일 철학자 칸트와 오리너구리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을까. 에코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 한 쌍을 일부러 대비시켰다”고 밝혔다. ‘부조화(不調和)의 상징’을 뭔가 ‘삐딱하게’ 표현한 것이리라.

요즘 현대건설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을 보노라면 ‘칸트와 오리너구리’가 떠오른다. 정부와 채권단, 현대 가(家) 형제들의 움직임이 새 세상의 흐름과 너무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올해초를 돌이켜보자. 새 세기가 시작된다며 얼마나 부산을 떨었는가. 목에 힘깨나 준다는 사람들은 마이크만 잡으면 “새 밀레니엄은 ‘생각의 속도’로 세상이 바뀌는 디지털 시대이니 삶의 틀을 바꾸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목청을 높였다.

현대건설 문제로 나라경제가 흔들리자 관계자들의 행태는 이런 거창한 구호와는 사뭇 다르게 나타났다. 정부 대표격인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이 심야에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을 만난 게 그 한 사례. 이 위원장은 정회장에게 “형제끼리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노력하라”는 정부 방침을 강력히 종용했다. 일이 다급하니 깊은 밤에라도 만나야 하겠지만 장관급 정부관계자가 민간기업인과 밀담하듯 접촉하는 것은 ‘글로벌 스탠더드’와 어울리지 않는다.

현대측 형제들의 만남도 그렇다. 16일 이들 형제가 만난 뒤 현대자동차측이 발표한 공식 문건을 보자.

“16일 정몽구 회장과 정몽헌 회장이 극적으로 만나 정몽헌 회장은 그간의 사정과 잘못했던 점을 형에게 사과한 후 용서를 구했고 현대건설의 자구안에 대해 가능한 선에서 협조를 요청했다. 이에 대해 정몽구 회장은 정몽헌 회장의 정중한 사과를 흔쾌히 받아들였으며 ‘과거는 잊자, 앞으로가 중요한 것 아니냐’고 위로했으며…”

형제끼리의 우애가 강조됐으니 그리 나쁜 풍경도 아니다. 효제(孝悌)는 한국인의 핏속에 녹아있는 덕목 아닌가. 하지만 수많은 이해관계인이 얽힌 거대한 기업의 총수들이 형제애를 내세워 이런 식으로 처리하는 것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디지털 시대에 웬 무협지 장면인가. 공사(公私)가 구분되지 않은 한편의 ‘블랙 코미디’ 아닌가. 그것도 정부 공인 작품….

현대 가(家)에서 ‘왕자의 난’이 벌어졌을 때 외국인 투자자들은 이를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외국인들은 기업의 의사결정 과정이 투명하기를 바란다. 혈족끼리의 권력다툼에다 가신 그룹의 할거(割據)까지 가세했으니 따가운 눈총을 보낼 수밖에. 그때부터 현대 관련 회사들의 대외신인도는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앵글로색슨족의 엄격한 이성(理性)이 이룬 오늘날 자본주의 질서는 참으로 냉정하다. 디지털 경제체제에서는 그 날카로움이 더할 것이다. 이들은 그런 냉정함으로 세계 경제체제를 구축해가고 있다. 한국경제가 막무가내 혈연주의, 정실주의(情實主義)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글로벌 경쟁에서 앞서가기 어렵다. <고승철 경제부장>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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