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규민/돈을 세탁한다는데

  • 입력 2000년 11월 13일 18시 45분


80년대 초반 우리의 군부 출신 대통령은 듣기보다 말하기를 즐겼다. 정보통신 소재인 광섬유의 국산화 성공을 두고 그는 “섬유는 염색이 가장 중요하다”는 엉뚱한 얘기로 훈시를 했고 ‘돈세탁’ 문제가 거론되자 “청결도 좋지만 세탁을 자주 하면 돈이 망가져 화폐를 찍는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고 말했는데 이 어이없는 말에도 좌중은 웃을 수조차 없던 시절이다. 역시 군부 출신인 그 다음 대통령은 우리나라 사상 최대 규모의 돈세탁을 통해 비자금을 조성했다가 임기 후 들통나 망신당한 기록을 갖고 있다.

▷돈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햇빛과 세금이라는 말이 있다. 검은 돈일수록 그런 성격은 더욱 강하기 마련이다. 돈세탁은 불법자금을 합법적 자금으로 바꾸는 과정으로 가명계좌를 여러 번 거치면서 도마뱀 꼬리 자르듯 추적을 피한다는 원리다.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 은행을 몇 차례 거치다 보면 돈의 꼬리는 더욱 찾기 어렵게 된다. 돈이 예금자의 비밀을 철저히 보장하는 스위스은행으로 들어간 기록이 있으면 수사기관은 추적을 포기하는 게 관례였다. 그러나 1998년 4월 스위스가 돈세탁방지법을 실시하면서 독재자들의 비자금은 헤매기 시작했다.

▷전세계적으로 한 해에 약 1조달러(약 1120조원)의 검은 돈이 세탁된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절반은 마약이나 불법무기 거래대금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해 54조원에서 169조원 정도 될 것(한국형사정책연구원 추정)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 규모를 파악할 방법은 없다. 선진국은 세금을 줄이기 위한 소득탈루가 주목적이지만 후진국에서는 뇌물이 세탁의 주대상이라고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인 우리나라가 이 부문에서 후진국으로 분류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뇌물이 횡행하고 있다는 징표다.

▷기록상으로는 전두환 대통령 시절부터 추진되어 온 돈세탁방지법이 이제야 입법과정을 밟고 있다. 사회정의 실천을 위해서, 또 소득의 투명성 확보를 위해서 꼭 필요한 법이지만 국민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정치자금이 이 법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수상한 돈을 의무적으로 신고토록 명문화하고 있지만 비정상적인 정치인의 금융거래를 신고할 수 있는 간 큰 은행이 과연 우리나라에 몇이나 될까.

<이규민논설위원>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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