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보의 옛날신문 읽기]청춘의 성적 방황과 좌절

  • 입력 2000년 10월 20일 11시 15분


얼마 전 개봉한 ‘청춘'이란 영화를 보셨나요. 신문의 리뷰 기사들은 ‘상처받은 청춘의 성적 방황과 좌절' 등의 제목을 달고 독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군요.

저는 아직 영화를 못보았는데, 고3 남학생 김정현이 여자 국어교사 진희경을 사랑하는 얘기랍니다.

청춘.... 지금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국어 교과서에 ‘청춘 예찬'이란 제목의 수필이 있었지요.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운운으로 시작하는, 대단히 웅장무쌍한 에세이였습니다.

아마 1800년대 말에 태어나서 해방 전에 돌아가신 어떤 분의 글이었을 겁니다. 제가 지금까지 이 수필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무슨 감명을 받아서가 아닙니다.

현실의 청춘들은 좁고 더럽고 냄새나고 먼지나는 교실에 갖혀 무가치한 정통종합영어와 수학의정석에 치여 지내고 있는데, 교실에서 도태됐거나 도태돼가고 있는 청춘들은 학교 화장실에서 담배 피우기나 수음 따위로 지긋지긋한 시간을 메우고 있는데, ‘청춘 예찬'의 작가는 ‘너의 두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 보라'고 권하질 않나, ‘석가는 무엇을 위하여 설산(雪山)에서 고행을 하였느냐'며 질타하질 않나,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라고 뜬구름 잡는 소릴 하질 않나, 그래서 지금까지 그 수필이 기억나는 겁니다.

이런, 얘기가 샛길로 빠졌습니다. 이십수년 전의 불쌍한 청춘 얘기를 하려다 그만 삼천포로 빠졌군요.

조선일보 76년 5월11일자 기사를 보시고 다시 얘기를 나누지요.

< 얼마 전 도심지에 있는 모 여자중학교 3학년 A반이 정상수업에 들어가기 앞서 가진 자기소개 시간에 일어난 일이다.

학생들이 차례로 나와 자신의 이름과 취미 등 짤막한 소개를 하는 것인데 10여번째로 나온 한 학생의 발언으로 이 시간은 중단되고 말았다.

“저의 지난 1년은 괴로움의 연속이었습니다. 더이상 고민을 숨길 수 없어요. 저는 E선생님을 좋아합니다. 그 시간만 되면 공부도 안되고....”

교실 안은 일순 학생들의 웃음소리와 수군거림으로 뒤죽박죽이 됐다.

담임 여교사는 얼어붙은 듯했다. 이튿날 학생의 부모가 학교로 불려오고 이 학생은 1주일 동안 생활지도부에서 반성문을 썼다. 뿐만 아니라 제 나름의 엉뚱한 생각과 발언으로 인해 E교사는 애꿎게도 전근당했다.

어느 학교에서나 이같은 예를 찾는다는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마디로 학생들의 비뚤어진 이성관 내지는 그릇된 성모럴이 몰고온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하략) >

어떤 어린이책은 이야기를 다 들려준 뒤 어린 독자에게 이런 식으로 묻더군요.(우리 어른들도 재미삼아 한번 해볼까요.)

1. E선생님을 좋아한다고 고백한 여학생의 죄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요?

2. 5월이면 봄볕 따뜻할 때인데 담임 여교사는 왜 얼어붙었나요?

3. 다른 여학생들은 선생님 대신 사돈의 팔촌을 사모했을까요?

4. 그 여학생은 반성문을 어떤 내용으로 채웠을까요?

5. E선생님은 왜 전근을 가야 했을까요?

6. 기자는 왜 학생들이 비뚤어진 성모럴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나요?

첫번째 문제만 답을 알려드립니다. 소녀의 죄는, ‘억압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알리고 까발리고 공개하고 공표하고 발표한 죄'입니다.

프로이트의 제자이자 동료였던 빌헬름 라이히는 일찍이 ‘성의 억압은 파시즘을 낳고, 성의 왜곡은 질병을 낳는다'고 주장했지요. 이 말을 다시 풀어쓰면 ‘성을 억압하면 심리적으로는 노이로제같은 정신질환을 유발하고, 사회적으로는 비민주적 노예를 양산한다'는 겁니다.

(`성'이라는 말이 징그럽다면 `사랑'으로 바꿔놓고 다시 읽어보세요. 그래도 징그러운가요?)

너무도 급진적이고 다분히 서구의 냄새가 풍기는 라이히의 주장은, 역설적이게도 여전히 보수적이고 갖가지 억압기제가 도처에 널려있는 한국에서 더 큰 울림을 줍니다.

이제 마흔이 되어 딸의 홍조를 사랑하고 있을, 이십수년 전의 소녀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늦었지만.

늘보<문화평론가>letitb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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