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꽂이]'유전자盲' 벗고 멋진 신세계 맞자

  • 입력 2000년 10월 13일 19시 01분


지금 미국에는 불치의 유전병을 앓고 있는 딸을 살리기 위해 정상적인 유전자를 가진 둘째 아이를 ‘맞춤제작’한 어느 부부를 둘러싸고 엄청난 윤리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부부는 자신들의 난자와 정자를 시험관에서 수정시킨 후 유전자 검색기술을 사용하여 딸에서 발현된 악성 빈혈을 일으키는 유전자가 들어 있지 않은 수정란을 골라 자궁에 착상시켜 사내 아이를 낳은 다음 그 아이의 탯줄 혈액세포를 누나의 골수에 이식했다. 사형 선고를 받아든 사랑하는 딸을 살리기 위해 부모가 움켜쥔 현대유전학의 지푸라기건만 다른 이들이 무슨 자격으로 그들에게 돌을 던지려 하는가.

인간 유전체의 전모가 거의 밝혀졌고 복제 인간들이 옆집에 살게 될 날도 멀지 않았다. 복제양 돌리가 만들어지자마자 종교계를 비롯하여 사회 여러 구석에서는 금방이라도 히틀러가 여럿 나타나 세상을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기라도 할 듯 호들갑을 떨었다. 돌리도 그랬고 복제 히틀러가 만들어져도 그렇지만 유전자 복제가 일어난 것이지 생명체 복제가 일어난 것은 결코 아니다.

아무리 일란성 쌍둥이라도 초기 발생단계와 성장과정을 통해 항상 똑같은 자극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완벽하게 똑같은 인물이 되지 않는 것처럼 유전자 복제기술로 태어난 인간도 나름대로 고유한 영혼을 지닌 엄연히 다른 인간이다. 지금 내가 나 자신을 복제한다 하더라도 그저 몇 분 차이로 태어나지 않았을 뿐 먼 쌍둥이 동생을 뒤늦게 얻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 전 우리 나라를 방문한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도 예언했듯이 아무리 철저하게 규제한다 하더라도 유전자 조작을 통한 ‘맞춤인간’은 물론 복제인간이 출현하는 일은 그저 시간 문제일 따름이다. 무지와 두려움으로 마음의 문을 닫으려 하지 말고 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멋진 신세계’를 맞이해야 할 것이다.

열린 마음을 가지려면 우선 무엇보다도 알아야 한다. 변화의 실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살펴야 하고 변화를 일으키는 과학적인 원인에 대해 배워야 한다. 세상은 이미 ‘유전자 시대’에 들어선 지 오래건만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유전자라는 용어는 즐겨 쓰나 그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문 것 같다. ‘유전자와 인간의 운명’을 ‘유전자맹 탈출’을 원하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특히 유전자 결정론을 등에 업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비판을 늘어놓는 선무당들에게 권한다.

▼'유전자와 인간의 운명'/ R.그랜트 스틴 지음/ 한국유전학회 옮김/ 전파과학사/ 334쪽/ 1만2000원▼

최재천(서울대교수·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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