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송호근/시드니의 고독한 전사들

  • 입력 2000년 10월 1일 18시 44분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때의 일이다. 마라톤 경기가 열렸던 대회 마지막날 필자는 우연히 학회 참석차 일본의 한 대학에 있었다. 경기는 자정이 넘은 시각에 시작됐는데, 한반도의 남쪽 하늘은 어둠을 밝히는 불빛으로 불야성을 이뤘을 것이다. 나도 잠을 자진 반납했을 국민의 축제에 기꺼이 동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력한 우승후보였던 황영조가 일장기를 달고 시상대에 서야 했던 손기정선수의 민족적 한을 말끔히 씻어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멀리 동이 터오던 무렵 황영조와 일본선수가 각축을 벌이며 몬주익 언덕으로 들어섰다. 이쯤 되면 잠은커녕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흥분의 고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 옆 방에서 수면방해죄로 고발을 하든 말든 아랑곳없이. 황영조가 결승테이프를 끊는 순간 필자는 마치 미친 짐승처럼 포효했다. 그리고, 곧 날이 밝았다.

아침 식사 때 나는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일본학자에게 새벽의 사건을 전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그 일본학자의 표정은 의외로 무덤덤했다. 올림픽에서의 우승은 축하할만한 일이지만, 자기네는 생활체육을 더 중시한다는 투였다. 말하자면 체육의 생활화가 더 중요한 것이지 올림픽에서의 우승은 스쳐가는 일회적 사건일 뿐이라고. 아이고, 참 웃기는 내숭이구먼, 하고 넘겼지만, 올림픽이 있을 때마다 그의 말이 떠오르는 것은 또 웬일인가.

강초현 윤미진 김영호 심권호 정재은선수와 농구 하키팀의 투혼이 온갖 사회문제와 경제적 침체에 시달리는 국민의 마음을 달래주고 있다. 꼴사나운 정치권의 싸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기에 그렇다치고, 파산 직전에 몰린 주식시장, 고유가 위협, 공적자금 40조원 추가 투여, 3개월이 넘는 의료공백, 이런 일련의 사태에 마치 방관자인양 비켜선 정부 등등으로 인해 흉흉하기 짝이 없는 민심을 달래주기엔 이만한 감동의 스토리도 없는 듯하다.

더욱이 메달의 주인공들이 보여준 맑고 청순한 표정과 겹쳐지는 불우한 가정환경은 국민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한 것이다. 사격, 양궁, 펜싱, 아마복싱은 인기종목도 아니었으며, 축구와 야구처럼 스타선수들이 고액연봉을 보장받는 그런 종목도 아니다. 4년마다 우리는 그들의 투혼에 환호하지만, 금메달의 영광은 다시 4년간의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 번듯한 사격장과 양궁장을 갖춰놓은 도시가 한 군데도 없다면, 그리고 펜싱 게임규칙을 시민들이 전혀 모른다면, 시민들의 환호는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가. 통계에 의하면, 주 3회 이상 운동하는 성인남자는 미국이 30%, 일본이 20%이며, 한국은 고작 8.6%라고 한다.

시민들의 무관심과 불우한 환경에서 뼈를 깎는 노력으로 승전보를 전해준 그들은 말 그대로 ‘고독한 전사들’이다. 이들은 남다른 자질과 능력이 있었기에 선수생활을 택했고 태극마크를 달았겠지만, 이를 악물고 태릉선수촌의 엄격한 규율과 혹독한 훈련을 이겨낼 수 있었던 진짜 동력은 헝그리정신이었을 것이다. 메달리스트에게 주어지는 얼마간의 연금과 해당협회의 포상금이 이들의 투혼을 유지하는 가장 큰 인센티브인 셈이다. 물론, 이들의 활약으로 시민들의 열의를 촉발하고 붐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한국의 체육은 시민들의 일상적 관심이 결여된 채 격리된 체육관에서 배양된다.

한국은 이번 올림픽에서 10위권 진입을 목표로 설정했다. 10위권에 든다고 해서 시민들의 체육의식에 변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시드니 하늘에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것을 누가 원치 않으랴만, 거리에서 조깅하는 사람들을 가뭄에 콩 나듯 보는 서울에서 마라톤 우승과 함께 TV 한 대를 덤으로 준다는 플래카드가 더 자주 눈에 뜨이는 것이 마라톤 강국의 현실풍경이다.

이봉주선수가 메달을 땄더라도, 그것이 조깅하는 사람을 늘렸을까는 별개의 문제다. 호주 시민들은 환경과 화합의 정신을 공유하는 문화적 여유를 즐긴 반면, 서울 시민들의 표정에서는 금메달을 향한 무지막지한 기대와 승전 욕심이 먼저 읽힌다. 서글픈 대조라고나 할까. 아무튼, 시드니에서 투혼을 불살랐던 태극전사들에게 성원의 박수를 아낌없이 보낼 일이다.

송호근(서울대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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