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방형남/대통령의 '私的 나들이'

  • 입력 2000년 9월 24일 18시 43분


할 일 많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일 모스크바 교외에 있는 노벨상 수상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82)의 별장을 찾아갔다. 러시아 최고의 권력자는 한때 대표적인 반체제 인사였던 노작가와 3시간 동안 진솔한 대화를 나눴고 그들의 회동사실은 전세계에 비중 있는 뉴스로 전해졌다.

이날은 꼭 10년 전 솔제니친 씨가 ‘우리가 어떻게 러시아를 일으켜 세울 것인가’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한 날이었다. 푸틴 대통령은 이를 거론하며 80년 이후 작가로서보다는 사상가로 활동해온 솔제니친 씨와 러시아가 문화적 일체감을 잃고 있는 데 대한 우려를 나눴다고 한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고집불통으로 유명한 솔제니친 씨는 두 사람이 나눈 문학적 향기가 짙은 대화내용을 외부에 알리며 “푸틴 대통령은 뛰어난 지성과 빠른 판단력을 갖고 있다”고 극찬했다.

푸틴 대통령 이전에 대통령으로서 문화계 인사와 격조높은 교유를 한 사람으로는 단연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전대통령이 꼽힌다. 문필가이자 철학자이기도 했던 미테랑 전대통령은 대통령 재임 시절에도 많은 문화계 인사들과 어울렸다.

엘리제궁으로 그들을 초대하기도 했지만 작가나 철학자들의 집을 직접 찾는 파격을 마다하지 않았다. 미테랑 전대통령이 개인적으로 문화계 인사들의 집을 방문하는 경우가 너무 빈번해 프랑스 언론은 그의 ‘사적인 행보’에 둔감해질 지경이었다. 그가 한두 사람의 수행원만 대동한 채 센강변에 있는 고서판매대를 방문하거나 파리시내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계 인사와의 교유를 대통령이 아닌 인간 미테랑의 사생활로 취급한 것이다.

다만 그가 퇴임하기 6개월 전인 94년 11월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 장 기통(당시 93세)의 집을 방문했던 일은 이례적으로 프랑스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당시 78세이던 미테랑 전대통령이 전립선암의 악화로 ‘6개월 시한부 인생’의 선고를 받았던 데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가 여생과 죽음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테랑 전대통령의 이런 문화적 소양을 익히 알기 때문에 프랑스인들은 그의 사후 완공된 새 국립도서관에 ‘미테랑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기꺼이 바쳤다.

푸틴 대통령과 미테랑 전대통령은 왜 밖으로 나갔을까. 동기는 조금 다를 수 있지만 결과는 같다고 생각한다. 바로 자신들도 국민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대통령도 평범한 자리에 누군가와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고, 흉금을 털어놓고, 때로는 위로받고 싶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떠들썩한 외국 나들이도 좋지만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푸틴 대통령이나 미테랑 전대통령 같은 ‘사람냄새’ 나는 사적인 나들이를 한다면 감동할 한국인이 많을 것 같다. 한국인은 요즘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을 딛고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의 사연으로 인해 연일 가슴을 적실 정도로 쉽게 감동하는 국민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권력과는 관계없는 인사들을 홀가분한 환경에서 만나면 정확한 민심을 읽는 데, 또 효율적인 국정 운영을 위한 아이디어를 얻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방형남<국제부장>hnbha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