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리뷰]'사라치' 황혼녘 중년에 큰 울림 주는 인생드라마

  • 입력 2000년 9월 21일 19시 01분


일본 연극계의 대표적인 연출자 오타 쇼고의 ‘사라치(更地)’는 92년 초연된 작품이다. 제목은 이전에는 집이나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없는 빈터를 가리킨다. 95년 고베 지진의 충격 속에서 일본인들이 자주 사용하게 된 단어다.

‘사라치’는 제목의 그 공간을 매개로 시간과 만나고, 다시 인간의 존재를 어루만진다. 이 작품은 일본 전통극 노(能)를 연상시키듯 느리게 전개되지만, 인간의 숨결이 가득하다. 스스로 인생의 반환점을 돌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울림이 더 클 작품이다. 이 점에서 테크놀로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로버트 윌슨, 리 브루어 등의 서구 실험극과는 선을 긋는다.

기계음이 울리는 가운데 처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횡으로 늘어선 창틀 블록 싱크대 화분 등 옛 집의 잔해. 언젠가 이곳에서 살았던 중년 부부(남명렬 김수기 분)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두사람은 자신들의 체취가 남아 있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찾아내면서 어린 시절부터 황혼녘이 더 가깝게 된 중년의 인생까지 기억을 더듬어간다.

쇼고에게 시간은 별 사건도 없는 이야기를 흥미롭거나 드라마틱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로 보인다. 실제 차분하고 진지하게 역할을 소화한 두 배우의 대사를 통해 질문을 던진다. 세상도 알고 두 사람도 아는 것은 분명 존재했던 것이다. 전쟁이나 큰 사건처럼 그것은 역사로 불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세상에서는 모르고, 두 사람만 알고 있는 사적인 기억은 과연 존재했던 걸까”라고. 특히 부부간의 내밀한 기억에 집착하는 한 여자의 모습은 살을 섞으면서 부부로 살아간다는 게, 나아가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허무함을 전달한다.

그래서 이들이 잔해 속에서는 끄집어내는 물건들은 남들에게는 하찮은 쓰레기일 수 있지만, 둘에게는 의미있는 ‘인생의 소품’으로 존재한다. 27일까지 월∼토 4시반 7시반, 일 3시 6시. 서울 동숭동 문예회관 소극장.

<김갑식기자>g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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