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부자가 친척을 꺼리는 이유

  • 입력 2000년 9월 15일 18시 54분


농경민족인 우리에게 땅을 일궈 거둔 쌀은 식량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예컨대 뒤주 쌀을 퍼준다는 것은 동고동락(同苦同樂)의 정까지 됫박에 얹어 보내는 것을 의미하고 ‘한솥밥을 먹는다’는 말은 동심일체(同心一體)의 정도가 거의 신앙적인 결속단계에까지 올랐음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쌀은 간혹 결정적으로 민심의 향배를 결정짓는 경우도 있었고 그렇다보니 정치적으로 대단히 민감한 품목이기도 했다.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타결을 앞두고 벌어진 대통령선거에서 당시 김영삼후보가 “당선되면 대통령의 직을 걸고 쌀수입 개방을 저지하겠다”고 공언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물론 교역환경이 자유무역이라는 거대한 물결 속에 휩싸여 돌아가는 터에 우리나라 정도가 반대한다고 쌀수입이 막아질 일은 아니었고 그래서 그 약속은 애당초 지켜질 수 있는 게 아니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선될 수 없을 만큼 우리 국민에게 쌀은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절박한 존재였다.

결국 YS는 대통령이 된 후 자신의 손으로 쌀수입의 빗장을 제쳐야 했고 쏟아지는 비판여론을 피하기 위해 불과 1년 사이에 세명의 농림수산부장관을 제물로 바치면서 국민의 분노를 달래려 애를 태웠다. 이맘 때 쯤 90%를 넘던 지지도가 60%대로 떨어져 민심이 이반되기 시작했는데 쌀을 놓고 거짓을 말한 데 대한 국민의 앙갚음도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런 쌀을 북한에 지원한다고 한다. 기실 분단 이후 남북한은 공식적으로 서로 한번씩 쌀을 무상으로 주고받았다. 84년 여름 태풍으로 서울이 물에 잠겼을 때 북한이 5만섬(7200t)의 쌀을 실어 보내왔고 95년에는 우리가 15만t을 보냈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북한당국이 허세를 부릴 양으로 식량원조를 제안한 것을 남측이 ‘옳다구나, 너희들 당해봐라’하는 식으로 덥석 받아들였던 것이고 후자의 경우 유엔이나 미국 일본 중국 등이 모두 돕는데 우리만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보냈던 것이라 두 경우 모두 주고받던 당사자들의 감정상태가 좋지는 못했었다. 식량원조 직후 북한 잠수정이 동해에 나타난 것이나 유엔안보리에서 한국대사가 “먹이를 주는 손을 물어뜯은 격”이라고 공격했던 것이 그런 분위기를 증명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지원을 요청할 만큼 작금의 남북한간 분위기는 외양상 대단히 우호적이다. 양쪽 사람들간에 쌀을 주고받을 기본 자세들도 전례에 비하면 긍정적으로 발전한데다 북한의 식량작황이 심각하게 좋지 않다는 형편이고 보면 국민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높을 수도 있다.

문제는 방식과 형식이다. 기왕 줄 바에는 ‘명절날 송이 받듯’ 참으로 기분 좋게 주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지만 단 전제가 되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국민적 공감을 얻어야 한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우리 민족에게 쌀은 식량 이상의 의미가 있는 예민한 품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는 그런 노력을 전혀 벌이지 않았다. 했다면 정치권의 여야대표에게 설명한 것뿐인데 지금 분위기 상 그들은 국민이 흔쾌하게 민의를 대표토록 위임해 준 대상이 못된다. 차관형태로 쌀을 보낸다면 상환조건은 어떻게 되고 상환의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도 정부는 말이 없었다. 남북경협자금으로 지원한다고 하는데 처음 한번 국회동의를 받았다고 언제까지 정부 마음대로 이 많은 돈을 쓸 것인지도 걱정이다.

더욱 궁금한 것은 북한이 무슨 조건으로 쌀을 요청했느냐 하는 것. 이 부분에 대해서도 정부는 일언반구 국민에게 설명이 없었다. “농사가 잘 안돼 어려우니까 형편이 나은 동족에게 그냥 부탁한 것이다”라면 그래도 좋다. 만에 하나 어떤어떤 것을 해줄 테니 그 대신 쌀을 달라고 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우리쪽이 남북화해의 폭을 서둘러 넓히려다 보니 북한에 요청해 놓은 것이 많은 눈치인데, 그래서 그 가운데 중요한 것 하나를 북한이 들어주는 대신 쌀을 달라고 했다면 그건 곤란하다. 같은 일이 반복되면 ‘부자는 친척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격언처럼 언젠가는 남쪽 국민이 그런 조건들에 식상할 날이 올 수도 있다. 진정 뒤주 쌀을 퍼주고 한솥밥을 먹는 심정으로 북한을 돕자는 것이라면 정부는 먼저 국민에게 솔직할 수 있어야 한다.

이규민<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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