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스무살 서태지 키드의 눈물 '

  • 입력 2000년 9월 7일 10시 23분


그가 돌아왔다.
그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가슴은 먹먹해오고 머리 속은 하얘지는 것 같다. 요즘 며칠 토플 공부를 하느라 TV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도서관에서 신문을 보다 어제 그가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기사를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 그것은 그가 왔다는 반가움보다는 신문의 사진 속 나와 같은 아이들이 들고 있는 "오빠 우리 많이 컸쪄?"라는 문구의 플랜카드 때문이었다.
(사진:지난 29일 귀국한 서태지-동아닷컴 황태훈기자)

그를 처음 만났던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나는 내가 그를 처음 본 순간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TV 모 연예프로그램의 첫 회 방송이었다. 그들의 수줍던 웃음은 방송을 더해갈수록 카메라를 향해 강하게 내미는 손짓만큼이나 당당한 프로의 미소로 바뀌었고 나는 그의 음악과 춤에 열광했다.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끼리 한 친구 집으로 가 '난 알아요'에 맞춰 춤 연습을 하곤 했고 '이 밤이 깊어가지만'을 밤이 깊어가도록 테이프를 돌려 들으며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곤 했다. 장기자랑 때 필기체로 'taiji & boys'가 쓰여진 검은 티를 입고 '환상 속의 그대'를 부르며 어설픈 랩 솜씨를 뽐내기도 했었고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를 연주하기 위해 피아노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하여가'가 나왔을 때 나는 매주 롤러스케이트장을 가던 날라리 중딩이었다. '너에게'를 들으며 사춘기 소녀 특유의 낭만적이고 달콤한 사랑을 꿈꾸던 나는 롤러스케이트장에 괜찮은 남학생이 없나 힐끔거리며 날렵하게 롤러스케이트를 탔다. 하여가의 마지막 부분 "이~~ 곳에서"하는 부분에서 묘기에 가까운 쇼맨쉽을 보이면서 마지막에 다리를 찢었고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다. 폼은 좋았는데 그 무거운 롤러스케이트 때문에 발목이 삐끗해 며칠간 걸을 때 고생을 해야했다. 소풍 때 반 친구들 몇 명이서 '죽음의 늪'에 맞춰 흐느적거리는 춤을 추기도 했고 '우리들만의 추억들'을 들으며 그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 한없이 기뻐했던 나날들.

"됐어, 됐어, 이젠 그런 가르침은 됐어~" 이 멜로디가 온 거리를 휩쓸던 즈음 나는 학교라는 비합리적인 체제에 맞서는 독립군처럼 아이들을 선동하고 다녔다. 학교의 귀밑 3㎝라는 경직된 두발규정에 대해 "머리는 잘라도 머리카락은 못 자릅니다"라는 비장한 항소문(?)을 내기도 했고 "자질이 부족한 교사는 학교를 떠나라" "왜 학생들의 개성을 몰살하느냐" 등의 도발적인 글을 당당히 학급회의록에 올려 교무실에 끌려가 다리에 피멍이 들 때까지 몽둥이로 맞곤 했다.

맞으면 맞을수록 거세게 저항했고 학교, 사회라는 곳을 증오했다. 학교라는 곳이 좀체 맘에 들지 않았고 가슴 설레던 첫사랑도 가슴 아프게 끝나버릴 무렵, 일기장에 '널 지우려 해'의 가사를 수십번 쓰면서 눈물을 흘렸다.

중학교 3학년 때, 복도를 걷다가 어느 선생님과 맞닥뜨렸다. 노랗게 탈색한 내 머리를 본 순간 그 선생님은 내 머리채를 잡고 흔들며 주먹으로 날 때렸다. 어느새 나는 문제학생이 되어 있었다. 내가 쳐다보면 후배들은 도망갔고 어떤 선생님들은 내 친구들에게 나와 멀어질 것을 권했다. 날마다 지각을 했고 지각비는 낼 수 없을 만큼 액수가 커져 버렸고 너그러우셨던 담임선생님은 농담삼아 "나중에 우리 반 짜장면 한 그릇씩 돌려라" 라고 말씀하시며 지각명부에서 날 지워주셨다.

나는 점점 반에서 겉돌았고 친구들과 놀러다니면서 자율학습을 땡땡이쳤다. 그러던 중 쉬는 시간 친구 교실에 놀러갔다가 이유없이 그 반 담임선생님께 '29년간 총정리' 책(무지 두꺼운!)으로 머리를 맞고, 학생과장 선생님으로부터 "너는 사고 안 치냐? 사고쳐서 전학이나 가라" 소리를 듣고, 가사시간에 과제물을 준비하지 않았다고 반 아이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가사 선생님으로부터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들은 후 나는 학교를 뛰쳐나왔다.

내 머리는 핑크색이었다. 길을 걷다가 나를 본 꼬마가 "엄마 저 언니 머리가 왜 그래?" 하고 묻자 아이 엄마는 "어휴, 넌 커서 저런 사람 되지 마"하고 대답했다. 엄마가 보고 싶었고 친구들이 보고 싶었지만 학교에 대한 증오가 너무 커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시끄러운 음악을 듣고 헤드뱅을 하고 길에서 친구를 사귀던 시절 이미 무심해져 버린 그의 노래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우린 아직 젊기에, 괜찮은 미래가 있기에 자 이제 그 차가운 눈물은 닦고 컴백홈." 순간 가슴에 응어리진 것이 모두 폭발했고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됐다. 떨리는 손으로 공중전화 버튼을 눌러 엄마와 통화를 했고 얼마 후 난 집으로 돌아갔다. 이미 자퇴서는 수리됐지만 졸업식 전날 50그릇의 짜장면을 교실로 배달시켜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나는 달라졌고 그도 'Goodbye'를 남기고 은퇴를 했다. 그의 은퇴기자회견을 보던 날 극성 팬처럼 소동을 부리진 않았지만 나도 모를 서러움이 복받쳐 하루종일 오열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 후 고등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를 합격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 사이 그가 솔로앨범을 냈었지만, 그것은 내게 큰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의 노래는 좋았고, 언제나 노래방에 가면 필승을 부르며 소리를 질러댔다. 어느새 고3이 되어 있었고, 1년간 열심히 공부한 끝에 원하는 대학에 입학했다.

21세기가 시작되고,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스무살이었는데, 이제 내가 스무살 대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중학교를 자퇴했던 내가 아이러브스쿨에서 우리 동기 동아리의 운영자를 맡고, 노랗게 탈색한 머리가 너무도 흔해졌고, 두발제한 반대서명운동과 탈학교모임이 매스컴의 주목을 받은 것처럼 세상이 너무도 많이 변한 시점에서 그가 돌아온 것이다.
(사진:서태지의 팬들이 공항에 붙인 환영 플랜카드-동아닷컴 황태훈기자)

난 그의 팬클럽에 가입한 적도, 먼 발치에서라도 그를 본 적도 없지만 그가 그의 인생에 있어 2할이 팬들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는 내 사춘기의 2할을 차지한 사람이었다. 난 그의 음악에 관해서, 그의 음악의 문화적 영향력에 관해서는 뭐라고 평론할 수는 없다. 단지 그의 노래가 좋았고, 그가 단순히 음악을 들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내 정신적 지주였고, 그의 노래가사는 내 지침서였던 시절이었다.

이제 어쩌면, 그는 내게 단지 음악을 들려주는 음악인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부끄럽지만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내 사춘기 시절과 그 때 나를 자라게 해주었던 그의 음악들은 평생토록 잊지못할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나와 동시에 서기회 홈페이지에 접속한 사람만도 1300명, "오빠 우리 많이 컸쪄?"라고 플랜카드를 쓴 이들도 그중에 있을지 모른다. 그들 역시 그의 음악과 함께 자랐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내 나이 스무살, 지금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은 지난 시간의 회상과 함께 내 앞에 펼쳐진 광활한 시간의 무대를 내 꿈으로 가득 채워보겠다는 다짐일 지도 모르겠다. 그 무대에서 지치고 쓰러질 때 그의 노래를 떠올려야 겠다. "실패해요, 쓰러지세요, 당신은 일어날 수가 있으니…"라는 가사를 말이다.

김수영 <동아닷컴 e포터> elf1052@m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