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분식회계 23조원'의 교훈

  • 입력 2000년 9월 3일 18시 57분


금융감독위원회 산하 증권선물위원회가 대우그룹의 분식회계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 수위를 결정하지 못해 표류하고 있다. 한국적인 기업 회계감사 풍토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었던 회계법인이나 회장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 임직원들에 대한 동정론이 제기돼 미뤄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대우그룹이 23조원을 분식회계함으로써 생긴 천문학적인 손실의 상당 부분은 공적자금, 쉽게 말해 국민세금으로 메워지고 있다. 국민이 져야 할 막대한 부담을 생각해서라도 분식회계와 부실감사 관련자들에게 법적 책임을 묻는 조치는 불가피하다. 이 같은 고통을 통해 선진국과 같은 투명한 기업회계 감사제도가 뿌리내리는 계기가 마련돼야 한다.

외부 감사인(회계법인)을 주주총회에서 선임하는 제도는 기업의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선진국에서는 무리 없이 작동되지만 그렇지 않은 한국에서는 주총을 장악한 대주주가 감사인 선임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상례였다. 부실기업들은 꼬치꼬치 따지기보다 부실 감추기에 협조할 수 있는 외부 감사인을 찾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런 풍토에서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회계감사가 이루어지다 보니 경제위기 직후에는 해외에서 한국 회계법인들이 감사한 재무제표를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이 터져 나왔다. 한국 회계법인들에 대한 해외의 신뢰도가 떨어져 높은 감사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회계감사기관을 외국 회계법인으로 바꾸는 기업들도 있다.

기업회계 감사시장을 외국 회계법인에 송두리째 내주지 않기 위해서도 경영실적을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공개하는 기업회계감사 제도를 확립하고 국내 회계법인들의 신뢰성을 확보하는 일이 시급하다.

재정경제부는 대우 분식회계 파문이 일자 대주주가 장악한 주주총회가 아니라 감사인 선임위원회에서 외부 감사인을 선정하도록 정기국회에서 관련 법률을 개정할 방침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감사인 선임위원회는 감사 2명 이내, 사외이사 2명 이내, 2, 3대 주주 2명, 채권단 2명으로 구성된다. 감사와 사외이사는 대주주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어렵고 2, 3대 주주도 대주주의 의사와 반대되는 결정을 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방식으로는 다시 대주주의 뜻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구성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대주주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채권단과 소액주주 등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감사인 선임위원회를 구성해야만 진정으로 투명하고 독립된 회계감사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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