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전진우/'월북시인' 의 詩碑

  • 입력 2000년 9월 1일 18시 59분


쥘상치 두손 받쳐/한입에 우겨 넣다/ 희뜩/눈이 팔려 우긴 채 내다보니/ 흩는 꽃 쫓이던 나비/울 너머로 가더라 <상치쌈>

투박한 나의 얼굴/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석류>

상추를 크게 싸서 입안이 미어지도록 우겨 넣는 틈새로 눈길은 얼핏 울 너머로 날아가는 나비를 쫓으니 이 얼마나 풋풋한 풍경인가. 보는 이의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매달릴 듯 싶다. 늦가을 농익어 저절로 벌어진 석류의 모습을 사람에 빗댄 가락은 또 어떤가. 떠꺼머리 숫총각의 건강함과 순박한 정을 대하듯 하지 않은가.

▷ '현대시조의 교과서' 로 불리는 민족시인 조운(曺雲)선생의 시조에는 이렇듯 우리네 서정과 정감이 오롯이 배어 있다. 그러나 조운은 분단 반세기가 넘도록 남한사회에서 '유폐' 되어야 했다. 그가 1949년 북으로 간 '월북시인' 이었기 때문이다.1900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난 그는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시인으로서 일제하 지역문화운동을 선도했다. 1921년 '동아일보' 를 통해 등단한 조운은 가람 이병기(李秉岐) 등과 함께 민족문학을 주창하며 외래의 자유시보다는 전통적 시조의 틀에 민중의 삶과 시대의 아픔을 담아냈다. 현대시조의 새로운 정형을 이뤄낸 선구자였다.

▷ 조운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선생의 시비(詩碑) 제막식이 오늘 오후 5시 영광읍 한전문화회관 앞에서 열린다. 당초 지난 7월 22일 영광군 교육청 앞에 세워지기로 했던 시비가 우여곡절 끝에 장소를 옮겨 세워지게 된 것이다. 우여곡절의 바탕에는 '월북시인' 을 보는 서로 다른 인식이 존재한다. 분단 55년, 전쟁 5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앙금처럼 남아있는 아픔과 미움의 상처들. 그것이 맹목의 적대가 되어 또다른 상처를 만든다면 이 땅의 평화와 통일은 영원히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 이제 그런 찌꺼기들은 묻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 묻어 거름이 되어 그곳에서 새로운 꽃이 피어나게 해야 한다. 돌에 새겨진 석류가 '가슴을 빠개 젖히듯' 그렇게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전진우 논설위원>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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