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 프로젝트21]잠들지 않는 도시 맨해튼

  • 입력 2000년 8월 29일 18시 44분


맨해튼은 ‘잠들지 않는 도시’다.

미국의 대도시들은 보통 오후 8시가 넘으면 도심은 블랙홀처럼 텅 빈 공간으로 바뀐다. 그 시간 도심의 빌딩들이 환한 불을 켜놓고 있다고 해도 차를 타고 다니면 모를까 도심을 걸어다니는 사람들은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황량한 공간이다.

하지만 뉴욕의 맨해튼은 밤 8시부터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우선 맨해튼 사람들의 저녁식사 약속은 밤 8시가 넘어야 한다. 그 전에 저녁약속을 잡는 것은 촌스런 일이 된지 오래다. 요즘에는 아예 10시쯤 저녁약속을 하는 것이 첨단패션을 따르는(chic) 일이 됐다.

고급 의상실과 화랑가가 밀집한 소호의 고급 레스토랑 ‘머서 키친’에 손님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시간은 밤 10시경. 8시반까지도 테이블이 절반 이상 비더니 9시반이 넘으니까 지하 1층 레스토랑의 테이블은 물론 1층의 바까지 사람들로 꽉 찬다.

이렇게 늦은 식사가 다이어트에 도움이 될리는 만무하다. 단순히 근육을 키우는 ‘육체미 가꾸기(Body Building)’라는 말 대신 신체 부위별로 들어갈 곳과 나올 곳을 조각하듯 가꾼다고 해서 ‘인체조각(Body Sculpture)’이라는 용어가 등장할 정도로 신체적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뉴요커들에게는 더욱. 하지만 언제나 과학보다는 유행의 힘이 더 강한 법.

워너브라더스의 해외출판물 스카우터인 마리아 켐벨은 “오후 늦은 시간 맨해튼의 사무실은 어딜 가나 피자나 도너츠를 먹고 있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면서 “하지만 정작 이들의 저녁식사 식탁에 오르는 스테이크는 미국 다른 곳의 절반 크기 밖에 되지 않는다”고 귀뜸해 줬다.

또 밤은 마치 만화 ‘이상한 나라의 폴’에 등장하는 삐삐가 마술봉을 휘두른 것처럼 맨해튼을 새로운 차원의 공간을 향한 통로로 바꿔놓는 시간이다. 어둑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사무실의 불이 하나둘씩 켜지는 맨해튼 마천루들은 하나하나가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백개의 눈을 지닌 거인 아르곤이 깨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거인들이 깨어나는 시간이 되면 맨해튼의 독신남녀들은 저마다 폴이 돼서 마왕의 손에서 구할 니나를 찾아 도심의 미로를 헤맨다.

소호와 이스트빌리지 첼시에 수없이 많이 생겨난 ‘바(Bar)’들은 분위기있는 음악에 술 한잔 걸치면서 대화를 즐길 수 있는 일과 성공을 좇아 맨해튼에 상륙한 수많은 싱글들의 집결지다.

첼시 지역의 허드슨강변 옆에 있는 ‘LOT61’. 겉에서 보면 허름한 창고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은은한 조명에 검은색 톤 인테리어에 맞춰 의상을 통일한 바텐더들이 컴퓨터로 주문을 받는다. 캐주얼 정장차림의 남자들과 착 달라붙는 검정색 원피스나 바지정장 차림의 여자들은 대부분 마티니를 마신다.

럼과 백포도주를 섞은 마티니는 가히 맨해튼의 술의 여왕이라고 할만하다. ‘LOT61’의 메뉴를 보면 마티니 목록이 빼곡이 적혀있는 페이지가 네 페이지, 종류는 90여 가지나 된다. 나머지 두 페이지 중 하나에는 맥주, 다른 하나는 위스키와 기타 술이 적혀 있다.

대부분 짝을 지어오거나 남녀가 각각 친구들을 데려와서 만나는 경우가 많지만 밤 11시가 넘으면 즉석 만남도 심심치 않게 이뤄진다. 이 때 중요한 것이 첫마디 인사말을 뜻하는 픽업라인(Pick―up Line).

뉴욕대에서 미술을 전공하는 아론 리펠스(21)는 “싱글들에게 자신만의 독특한 픽업라인은 사인과 같다”며 “뉴욕에서 싱글로 살아남으려면 멋진 픽업라인부터 만들라”고 충고했다.

만일 미술적 감수성을 지닌 남자로 상대에게 비치기를 원한다면 ‘Nice Figure, Italian?’도 괜찮다. 이 말은 ‘몸매가 멋있는데 이탈리아 출신이십니까?’라는 뜻과 함께 ‘멋진 조각품이네요. 이탈리아제입니까?’라는 중의법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직선적인 터프가이로 비치기를 원하다면 “당신의 피에 한국계가 섞여있느냐”고 묻고 당연히 “노”라고 답할 때 “그러면 한번 섞어보는 것이 어떠냐”는 말로 웃음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뉴욕에선 이 한두줄짜리 픽업라인을 위한 전문적 잡지가 등장할 정도다. 하지만 픽업라인의 생명은 독창성. 어디서 한번 들어본 것 같은 내용이면 효과가 금방 떨어진다. 이쯤되면 일본의 하이쿠 못지않다는 말도 농담만은 아니다.

맨해튼의 미로에는 아무리 멋진 픽업라인으로도 열 수 없는 요지경의 세계도 숨어있다. 소호 그랜드호텔 2층에 있는 ‘그랜드 라운지’도 고급스럽기로 유명한 바. 자정 가까운 시간에도 월스트리트에서 방금 걸어나온 듯 말끔한 정장차림의 남자들과 마티니를 흘끔거리는 여자들로 발디딜 곳이 없다.

하지만 진짜는 이 라운지의 끝에 있는 출입문 뒤에 감춰져 있다. 그 앞을 지키고 있는 ‘덩치들’의 주머니에 40달러 가량을 찔러주며 “캐비어 맛 좀 보러왔다”는 주문을 외어야만 열리는 그 문은 1층 발코니로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 그곳에는 캐비어를 안주삼아 고급포도주를 맛보는 또다른 비밀의 장소가 숨어있다.

다시 그곳을 나와 소호와 이스트빌리지의 밤거리를 걷는다. 오전 2시가 넘는 시간에 비까지 퍼붓지만 밤거리는 젊은이들로 북적거리고 여전히 불을 밝힌 바들은 음악소리와 흰 연기를 거리로 뿜어낸다. 발 밑으로는 그 시간까지 지하철이 달린다. 지하감옥에 갖힌 용처럼 울부짖으며.

19세기말 서정시인 부르디용의 ‘밤은 천개의 눈을 가졌다’는 싯구마냥 맨해튼도 천개의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뉴욕〓권재현기자>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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