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한성열/남북 문화차이부터 인정을

  • 입력 2000년 8월 15일 17시 55분


50여년 동안 생사조차 모르며 꿈에도 잊지 못하고 그리던 가족과 얼싸안고 기쁨과 회한에 몸부림치는 이산가족들의 상봉을 보며 진정한 통일이 과연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이산가족의 만남은 이제 통일이 더 이상 이루어 지기 힘든 소원이 아니라 머지 않아 현실로 다가올 수 있는 실체적 사실이고, 또 통일이 이산가족들만의 만남을 넘어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남과 북의 모든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엄청난 사건임을 일깨워 주기에 충분하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흥분을 가라 앉히고 한반도의 진정한 통일은 무엇이고, 또 어떻게 그것을 앞당길 수 있을 지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 봐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의 통일 논의는 주로 정치적, 경제적 측면에만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하지만 정치적 경제적 통일 못지 않게, 오히려 진정한 통일이라는 측면에서 더욱 더 중요한 것이 심리적 통합을 이루는 것이라는 점은 우리보다 먼저 통일을 이룩한 독일의 경우에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10여년 전에 이미 정치적 경제적 통일을 이룬 독일은 아직도 서독 출신과 동독 출신 사이에 심리적 통합이 이뤄지지 않은 채 오히려 동서간의 정서적 대립이 더 심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내에서 개최된 한 강연회에서 헬무트 슈미트 전 독일 총리가 준 충고, 즉 "통일 과정에서는 언젠가 희생하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 정치 경제적 준비 못지 않게 이를 극복하려는 정신적 심리적 준비가 필요하다"는 충고는 심리적 통합에 대한 치밀한 준비 없이 맞이 하는 정치적 경제적 통일에 예상 외로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다.

통일 후의 심리적 통합이 쉽지 않은 과제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는 탈북자들의 남한사회에 대한 적응 실태이다. 89년에 귀순해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현재 냉면집을 운영하는 등 '자본주의에 가장 잘 적응한 귀순자'라는 평을 듣고 있는 전철우씨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귀순 생활 10년이 꼭 행복하지만은 않았다"고 털어놓으면서, "내가 만나본 귀순자의 80%가 '남한이 지긋지긋하다'며 고개를 젓습니다"라고 귀순자들의 솔직한 심경을 전했다. 아마 우리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남북간의 대립이 더욱 심화하고 많은 사람이 후회하는 통일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보다 앞서 통일한 나라들의 불행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부터 심리적 통합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치밀한 준비와 교육을 해야 할 것이다.

남북한간의 심리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서로간의 문화적 차이를 인정 하는 것이다. 우리가 단일민족으로서 분단의 시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동질적인 문화 속에서 생활해 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동일한 사회 속에서도 문화는 변하는 것이고, 더군다나 남과 북은 서로 이질적인 정치 경제 체제 속에서 반세기 동안 생활해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동질적인 면 못지 않게 이질적인 면을 갖게 됐다. 이 점은 귀순자들이 한결같이 서로 상이한 문화 때문에 적응하기 힘들었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다. 만약 현실적인 차이점을 인정하지 않고 '감상적 동질성'의 환상을 갖고 있다면, 이 환상이 깨지는 날 상대방에 대한 미움과 비난이 커지고 통일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이러한 문화적 차이점을 인정하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심리적 개방성'이다. 단순히 서로간의 차이점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심리적 통합을 이룰 수 없다. 만약 이 차이점을 통일의 방해요소로 보고 시급하게 없애려고 한다면, 서로간의 불신만 늘어나고 끊임없는 권력 싸움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로 구성된 여러 나라에서 성급하게 문화적 이질성을 없애려는 용광로 정책이 실패로 끝나고 결국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바뀐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심리적 통합을 이루는 가장 빠른 길은 서로를 인정하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가야 할 동반자라는 인식을 갖는 것이다. 어느 한 편이 상대방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거나 우월감을 가지고 있을 때 그 결과는 반목과 질시만 있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한성열(고려대교수·사회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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