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충식]8월의 ‘핏줄 紀行’

  • 입력 2000년 8월 7일 19시 02분


8월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나라를 빼앗긴 국치일(國恥日·29일)이 있는 달. 이민족의 지배에 36년을 허덕이다 헤어난 광복의 달. 이런 엇갈린 회상 속에 나는 묘하게도 조선 핏줄로 일본 외무대신을 지낸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1882∼1950)를 떠올린다.

일본이 미국에 전쟁을 선포할 때, 또 무조건 항복할 때 두차례 외무대신을 지낸 사람이다. 태평양전쟁, 처음부터 일본이 이길 수 없었던 그 전쟁에 한반도에서 징병, 징용, 군위안부 등으로 숱한 젊은이가 잡혀가 희생당했다. 그리고 일본의 패전은 바로 한국으로선 꿈에도 그리던 광복이 아니었던가. 그 일제의 개전음모와 패전처리의 한가운데 ‘조선 핏줄’이 서 있었던 것이다.

알려진 대로 시게노리는 정유재란 때인 1597년 8월경 남원에서 잡혀간 도공(陶工)의 핏줄이다. 나라의 무능 때문에 그의 선대는 왜군에 붙잡혀 ‘기술노예’로 끌려갔다. 조선인 노예 가운데 포르투갈 배에 팔려간 사람들보다야 처지가 나았지만, 도공들은 낯선 일본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다. 시게노리의 아버지 박수승(朴壽勝) 대까지 그렇게 250여년을 살았다.

박수승은 조선 성씨를 그의 대에서 끊었다. 차별과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한 귀화였다.아들 박무덕(朴茂德)이 다섯살 때, 박씨네는 도고(東鄕)라는 성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무덕은 시게노리가 되었다. 영리한 아들은 가고시마 중고교를 졸업하고 도쿄대학에 들어가 독일문학을 전공한다. 그리고 외교관 시험에 합격해 독일 소련에 근무했다.

그의 아내는 독일 여자였다. 주독일 외교관 시절, 일본에 오래 산 적이 있는 에디 드 라론드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여자의 사별한 남편 게오르그는 바로 김영삼 정부 때 헐어버린 조선총독부 건물(옛 중앙청)을 기본 설계한 기사다. 그것도 참으로 기이한 연(緣)이다.

시게노리 부부 사이에는 외동딸뿐이었다. 그 딸과 결혼한 사위(외교관)가 장인의 성을 받아 이어 도고 후미히코(東鄕文彦)가 된다. 그는 북미국장이 되어 미일간의 오키나와 반환교섭 실무책임을 맡았다. 당시 미일공동성명에 ‘한국의 안전은 일본의 안전을 위해서도 긴요하다’는 구절을 넣어 큰 정치적 반향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73년 8월 한국 중앙정보부가 김대중씨를 납치, 일본을 경악케 하고 한일관계가 위태롭게 되었을 때 일본측 수습 사령탑은 바로 그 ‘조선핏줄’의 사위 후미히코 외무차관이었다.

시게노리는 핏줄 얘기를 입에 담은 적이 없다. 핏줄의 핸디캡을 이겨나가기에 너무 힘겨워서였을 것이다. 그래도 핏줄을 잊은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출세해서도 고향 나에시로가와 산에 있는 옥산궁(玉山宮), 남원의 조상 혼령을 기리는 그곳을 늘 정성을 다해 참배했다. 외교관 시절 도공 핏줄의 중학후배 심수관(14대)의 손을 꼭 잡아주며 격려도 했다. 1933년 외무성 구미국장시절 조선 청년 장철수(나중에 한국 외무부 국장)가 외교관 시험을 거쳐 올라오자 ‘여러 어려움이 있겠지만 인내하고 열심히 하라’고 등을 두드려준 것도 시게노리였다.

시게노리는 일본의 패전으로 전범 신세가 되어 미군교도소에 갇혀 있다가 1950년 병사했다. 감옥에서 외교관 생활을 회상한 ‘시대의 일면’이라는 수기를 남겼다. 최근 ‘격동의 세계사를 말한다’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책이다. 이 책의 한군데에 눈길이 멎는다. 일본이 왜 미국을 무모하게 치고 결국 패망했는지에 관한 색다른 해답이다.

‘과학의 진보에 대한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원자폭탄만 하더라도 히로시마에 떨어지기 수개월 전 일본의 권위자가 이번 전쟁에는 실용화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 판이다. 한마디로 전체적인 수준의 문제(미일간의 과학 격차)였다. 그리고 정확한 통계와 분석이 없이 대든 것도 문제였다. 군함 수량만 해도 전쟁이 길어지면 점점 소모가 많아질텐데, 군측은 전쟁 2차 연도에 군함 소모가 줄어든다. 미군 잠수함에 대한 대응이 잘 돼있으니 걱정 말라는 식이었다.’

그런 탄식을 통해 문득 오늘의 우리를 돌아본다. 과학의 진보에 관한 우리의 인식과 예상, 그리고 한국의 전체적인 수준은? 국정을 이끄는 정부의 통계와 분석에 관한 정확도는? 다시 8월이다. 망국과 광복, 기술노예 후손의 기구한 삶이 엇갈리는 가운데 한국의 오늘과 미래를 생각해 본다.

<김충식 논설위원>seeschem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