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보의 옛날 신문 읽기]아! 위대한 히프

  • 입력 2000년 7월 30일 20시 30분


요즘 전국적으로 춤바람이 났다고 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살사니 라틴댄스니 하는 고난도의 춤까지 배워가며 즐긴다는군요. 바야흐로 ‘쉘 위 댄스'의 시대입니다.

예전엔 춤하면 뭐랄까, 퇴폐적이고 그런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지요. ‘자유부인'으로 상징되는 춤바람 주부는 얼마나 지탄받았습니까. 70년대 열사의 땅 중동에서 노무자로 일하던 산업역군들의 아내들이 캬바레에서 춤추다 제비족을 만나 패가망신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네, 이번엔 춤 얘깁니다. 먼저 십수년 전의 신문기사 한편을 읽어보지요. 경향신문 86년 7월21일자입니다.<디스코걸 격렬한 율동타고 서울에만 4백명>이란 제목에 <특 A 한번 출연 60만원><지하실서 합숙훈련, 스트립쇼와 구별해주기 원해>란 부제가 붙어있는 기사입니다.

몸 흔드는 것이 버릇이 되어버린 ㅅ양은 디스코 경력 4년의 스물네살. 84년도 미인 콘테스트에 입상경력도 있는 중류 가정 출신. 여고 때 배운 국악과 고전무용을 팽개치고 디스코걸이 되었다. ‘좋아하는 춤을 실컷 추며 사는 화끈한 인생'이 오히려 즐겁다는 ㅅ양의 특기는 히프 율동. 그래서 ‘힙순이'로 통한다.

같은 디스코걸 세 사람-잠잘 때 이를 간다는 ‘이갈이', 춤출 때 얼굴표정이 일품인 ‘클라이맥스' ㅇ양, 가슴율동이 특기인 ㄱ양 등과 아파트를 빌어 함께 산다. ‘화끈한 인생'이기 때문에 사랑도 화끈한 단발형이어서 평범한 결혼은 체념한 상태.

‘디스코와 스트립쇼는 전연 별개'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지만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그 ‘한계가 모호해지는 것이 안타깝다'는 프로의식이 엿보이기도 한다.

‘밤에만 피는 꽃'으로 불리는 디스코걸들은 전용클럽은 물론 스탠드바에까지 진출, 그 숫자를 파악하기 조차 어려울 정도로 늘어났다. 그러나 역시 주활동 무대는 서울 한남동과 강남. 서울시내 전체로는 약 2백∼3백곳에 3백∼4백명 정도로 추산된다. 기본조건은 미모와 신장 1m65cm 이상에 하체가 길어야 한다. 춤솜씨는 물론 필수.

‘관능적인 율동'을 개발하기 위해 속칭 교습소를 다닌다. 디스코걸들은 대개 특A급에서 C급까지 4등급으로 나뉜다. 특A는 도사급. 무용을 전공했으며 외국어에 능통한데 연예인 뺨치는 자기관리를 하면서 특별무대에만 오르는 급으로서 한 스테이지당 50만∼1백만원씩 받는다.

그러나 이들은 외국인 접대나 특수층들만 상대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잘 모른다. 특A급들은 평범한 디스코춤뿐만 아니라 분위기에 따른 적응력도 뛰어나다.

TV 무용수 출신이나 발레리나 출신도 몇명 있다는 소문. A급은 경력 2년 전후의 전성기, B급은 나이가 들었거나 1년 미만의 애송이, C급은 미모가 떨어지거나 춤이 서툰 층. A급은 한달에 월급 50만원선, B급은 30만원이지만......(하략)

▼야한 춤을 추는 ‘힙순이' ▼

기사에는 글 속에 언급된 ‘힙순이'가 야하게 춤추는 사진 한장이 걸려있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 온몸을 내놓고 율동 속에 살아가고 있는 디스코걸들. 이들은 요즘 춤의 농도가 짙어져가는 것이 불만이라고 털어놓았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힙순이', ‘클라이막스', ‘이갈이'라는 세 여주인공의 별명이 참 재미있지요? 과연 이 여자들의 별명이 그러했는지, 아니면 기자가 재미삼아 붙인 것인지 확인한 길은 없습니다만.

`히프율동'이란 조어도 참으로 섹시하고 리드미컬한 이미지를 던져주고 있군요. 기자가 댄서를 보는 시각에는 직업에 대한 어느 정도의 편견도 들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디스코는 매춘집의 밤과 같은 일시적인 전율일 뿐이다? ▼

디스코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1970년 후반부터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미국의 댄스곡'이라고 설명돼 있습니다만 이게 사실은 좀 오류가 있습니다. 원조는 프랑스지요. 나치독일의 파리 점령기 때 디스코가 유행했다는군요. 디스코는 미국으로 건너가 흑인들의 환영을 먼저 받았습니다. 이게 나중에 전세계로 퍼져 한국땅에도 건너온 겁니다.

디스코 하면 떠오르는 영화와 인물이 있지요. 네, ‘토요일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라는 영화와 주연배우로 출연했던 존 트래볼타지요.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 앨범이야말로 디스코를 세계로 수출한 역군이었습니다.

영화음악을 맡았던 밴드 비지스는 변절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떼돈을 벌었지요. 당시 록 비평가였던 로버트 힐번 같은 사람은 “60년대 록 가수들은 사랑의 고통을 노래했다. 그러나 디스코는 매춘집의 밤과 같이 일시적인 전율일 뿐이다”라고 한탄하기도 했답니다.

▼‘힙순이'의 ‘히프율동'에 위로받다 ▼

그건 그렇고 한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나치 치하의 파리에서 시작된 음악이, 게다가 차별받는 흑인이 즐기던 음악이 왜 얼마 뒤 비지스라는 백인밴드와 존 트래볼타라는 백인배우에 의해 주도됐을까요.

당시 미국은 월남전을 끝내고 경제호황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 혜택은 물론 백인들에게 돌아갔지요. 고민이 없어지고 인생이 행복해진 백인들에게 디스코만큼 듣기 쉽고 신나는 음악이 없었던 겁니다. 백인 밴드, 백인 배우가 디스코의 황제로 등극한데는 이런 사회경제적인 이유가 있었지요. 당시 불황에 시달리던 영국에서는 ‘저항의 음악' 록이 발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래서 시사적입니다.

86년 7월21일자의 신문을 다시 봅니다. 사회면에는 젊은이들이 얻어터지고 잡혀갔다는 1단 짜리 기사가 실려있군요. 그리하여 그 시절의 ‘힙순이'들은 선정적인 ‘히프율동'으로 생각하기 싫은 자들, 고민하다 지친 자들을 위무했을 겁니다. 아아, 위대한 히프.

늘보<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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