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령기자의 책·사람·세상]'가난한 도서관'

  • 입력 2000년 7월 21일 18시 50분


출판사에서 10년 넘게 에디터를 하다가 뒤늦게 미국 하버드대 대학원으로 유학간 이영준씨. 도서관 이용 오리엔테이션 때 기가 질렸노라고 털어놓는다.

“몇해 전 동아시아학과 대학원생이 논문 준비에 필요하다며 1910년대 일본신문이 필요하다고 요청했대요. 도서관측에서 수소문해 자료를 사다줬는데 그 비용이 물경 20만달러(한화 2억2000여만원)였답니다. 앞으로도 누군가 필요로 할 자료라서 사다줬다, 우리가 자료는 지원할 테니 당신들은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자신만만하게 얘기했다더군요.”

서울대 중앙도서관의 2000년 한해 도서구입 예산은 25억5000만원. 단행본과 학술지, 날로 비중이 커지는 전자자료 구입을 모두 포함한 금액이다. 서울대측은 IMF사태 이후 예산 삭감으로 몇 년째 ‘허리 졸라매기’에 골몰하지만 이만한 예산도 타 대학 처지에서는 입이 벌어질 지경이다.

▼도서구입비 쥐꼬리 수준

그러나 ‘선진국 수준의 지식기반사회가 되자’는 마당에 열악한 국내 대학끼리의 키재기가 기준일 수는 없다. ‘도서관’ 하면 떠올리는 단행본의 경우, 서울대 중앙도서관은 2000년 한해 5억원으로 필요한 국내외 단행본들을 모두 사야 한다. 하버드대의 경우 교내 90여개 도서관 중 동아시아 전문인 옌칭도서관 한곳이 99년 한국책을 사는데 쓴 돈만 약 15만달러(한화 약 1억6600만원)다.

정작 중요한 것은 도서자료 구입비의 많고 적음보다 “도서관은 그저 책이 있는 곳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책을 주문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인식이 당연한 ‘복지권’으로 공유될 수 있는가 없는가다. 책의 주문자는? 세금을 낸 시민과 그 가족, 교수와 학생 누구나가 아니겠는가?

▼지식인프라 구축 첫걸음

몇 년 미국살이를 하며 공공도서관에서 대출을 해본 사람들은 찾는 책이 없을 때 사서로부터 “Do you want to order that?(주문하시겠어요?)”라는 질문을 듣고는 황송해했던 경험을 얘기한다. 서울 목동 양천도서관에 “찾는 책이 없어서…”라고 구입문의를 하자 “신청이야 자유지만 책이 꼭 구비된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며 오히려 질문자를 딱하게 여긴다. 책을 제 돈으로 사야지 왜 나랏돈 쪼개쓰는 공공기관에 의존하느냐는 태도다.

미국 도서관들도 국고만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자기 이름의 도서관 지원 재단을 운영하는 빌 게이츠는 98년 시애틀 한 도시의 공립도서관에만 2000만달러(한화 약 220억원)를 기부했다.

첫걸음은 발상의 전환이다. 도서관에 당당히 자기가 보고싶은 책, 연구자료를 요구할 수 있고 또 그것을 지원해야 마땅하다고 여기는 사회와 여유 있는 사람만 책도 사 보고 연구도 할 수 있는 사회의 지식 인프라 수준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 것인가?

ryung@d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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