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충식]이런 '실사구시'

  • 입력 2000년 6월 30일 19시 28분


우리나라 대학 중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국립 서울대학교, 올해 2월 졸업식에서 총장은 ‘형설(螢雪)의 공’이라는 말로 운을 뗐다. 반딧불이의 조명으로 책을 읽어 성공했다는 옛 중국 고사의 되풀이 인용이다. 같은 무렵 다른 대학의 졸업식에선 총장이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마부위침(磨斧爲針), 그리고 남의 고통을 덜어주고 행복을 안겨주는 발고여락(拔苦與樂) 등 주옥같은 4자성어를 빌려 덕담을 베풀었다.

일본의 간판대학이라고 할 도쿄대, 올해 봄 학위수여식의 총장 스피치는 사뭇 다르다. 총장은 인간게놈에 관한 얘기, 인간의 달 착륙에 비견되는 위대한 결실이라는 유전자암호 풀기에 관한 화제로 시종했다. 불문학자인 하스미 시게히코(蓮實重彦)총장은 그 연구의 전문가도 아니며, 따라서 그 본질과 디테일을 말할 전문지식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한국 대학인 사고틀은 추상적▼

그래서인지 시사뉴스 소개로부터 화두를 풀어나갔다. 미국과 영국의 수뇌가 인간게놈의 해석 결과를 공공의 지식으로 세계에 공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뉴욕타임스나 르몽드지가 이것을 크게 보도했다, 이 바람에 인간게놈 연구에 돈을 쏟아부어온 미국의 셀레라 제노믹스같은 생명공학분야 대회사들의 주가가 폭락해버렸다는 등.

그리고 하스미총장은 뉴욕타임스에 실린 프린스턴대의 리 실버교수의 기고문 ‘투자를 위한 과학은 나쁜 게 아니다’는 글을 인용해가면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주장을 펼쳐 보였다. 즉 인간게놈에 관한 영미 수뇌부의 잽싼 생색과 그로 인한 생명공학 산업의 동요를 지켜보면서 ‘21세기에 무엇을 공적 지식으로 개방할 것이며 무엇을 개인의 지적소유권으로 보호할 것인가. 대학과 연구자들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실로 중대한 논란거리가 될 것이다’는 문제제기였던 것이다.

어떤 식의 졸업식사가 좋고 나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분명한 것은 인사말 형식만을 기준으로 볼 때 한국 대학인의 사고 틀이 총론적 추상적 종합적 도덕론적 규범론적이라고 한다면, 일본측은 훨씬 각론적 구체적 개별적 실용적 시사적이고 인포머티브하다는 점인 것이다. 한국적 시각에서 보면 엉뚱하기만 한 하스미총장의 스피치에서, 나는 백수십년 전 일본인들이 네덜란드의 해부학 책을 판독해가면서 서양의학을 깨우쳐 가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같은 시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거친 파도가 밀려오는 가운데 한반도의 선비 선인들은 정보 지식과는 거리가 먼, 결코 현장중심적일 수 없고 인포머티브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중국 고전에 매달려 우국충정을 불태우고 나라의 비운을 통분해 했다.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러한 지식정보 습득 관행과 의식의 차이를 한일 대학 졸업식 스피치에서 읽는 느낌이다.

한두 해 전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르윈스키와의 ‘부적절한 관계’로 세계의 이목을 끌 때 나는 93년에 벌써 클린턴의 사고와 행태를 정확히 짚어내고 이런 사태를 예견(?)한 글 한 편을 떠올렸다. 바로 일본의 문예춘추 잡지에 미쓰이물산 워싱턴사무소장 데라시마 지쓰로가 쓴 ‘미국의 새로운 노래’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현실'의 정보나 진단 넘쳐야▼

그 글은 클린턴이 이른바 베이비부머(미국의 46∼64년 출생자)로서 프리섹스 반전운동 마약에 익숙한 세대이기 때문에 불륜도 마약도 나쁜 것이라고 느끼는 죄의식이 별로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일본을 향해 “이 젊고 수상쩍은 대통령을 결코 무시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미국은 혼돈 같지만 사회-국가-세계를 겨냥한 새 시스템 조성에 지혜를 짜기 시작했다. 일본인이 삼가야 할 일은 클린턴이 별게 아니라거나 그의 참모들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식’의 비판이다. 이 시점에서 볼 때 클린턴의 시련과 성공을 취임 직후부터 이처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안목이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이러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보나 진단이 넘쳐야 한다. 총론적 도덕론은 늘 맞는 말일 수는 있지만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일 수 있다. 인간 사회가 도덕 규범만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각론적으로 ‘낱개’를 잡아 파헤치고 그것들을 바탕으로 ‘앞 날’을 말하는 연구자 사업가 전문가가 많아야 한다.

김충식<논설위원>sear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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