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송기도/'페루사태'에 확실한 태도 보이자

  • 입력 2000년 5월 31일 19시 19분


페루의 야당 후보인 알레한드로 톨레도 후보가 선거 부정을 이유로 불참한 가운데 치러진 5월 28일의 페루 대선 결선투표에서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이 50.9%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후지모리는 페루 역사상 처음으로 3선에 성공한 대통령이 됐지만 ‘상처뿐인 영광’이다.

후지모리는 유효투표의 74.6%를 득표했고, 출마를 거부한 톨레도는 25.4%를 얻었다. 그러나 1차 투표에서 2.3%였던 무효표가 결선투표에선 무려 31.4%나 됐다. 페루 선거법상 투표에 불참하면 월 최저 생계비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벌금을 내도록 돼 있기 때문에 억지로 투표장에 간 국민은 투표용지에 ‘부정선거’라고 썼다. 그 표가 전체 투표의 3분의 1이나 된 것이다.

1차 투표에서 후지모리 대통령은 49.8%의 지지를 얻어 40.2%의 득표를 한 톨레도 후보에 10% 가량 앞섰지만 과반수 확보에 실패해 결선투표를 하게 됐다. 모든 주요 언론을 완전히 장악한 정부 여당은 선거기간에 언론을 통해 원주민 출신의 톨레도 후보를 무차별 공격했다. 정부를 비판한 기자와 신문사는 테러를 당했다. 관권과 금권에 의한 부정선거가 자행됐다. 1차 투표가 끝나고 발표된 출구조사가 6시간만에 뒤바뀌었는가 하면 개표가 4일 동안이나 계속됐다.

컴퓨터 조작 등을 이유로 톨레도 후보와 미주기구(OAS), 국제선거감시단은 결선투표를 2주일 이상 연기하라고 요구했지만 페루 선관위는 전국의 투 개표소 컴퓨터를 하루만에 점검한 뒤 컴퓨터 조작을 통한 선거부정 우려는 기우라며 개표를 강행했다. 이에 톨레도 후보는 결선투표 참가를 거부했으며, OAS와 유럽연합(EU)은 선거 감시단을 철수시켰다.

미국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과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등 남미 주요국가들은 후지모리의 재선은 정통성이 결여돼 있다며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캐나다는 대사를 소환했다. 미국은 페루와의 관계가 재정립될 것임을 강력히 시사했다.

톨레도 후보는 평화적 시민저항운동을 주장하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선거가 끝난 직후 후지모리 반대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돼 갔으며 경찰의 발포와 시위대의 방화로 페루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수도 리마에는 수십 만명이 반정부시위를 벌이고 있으며 일부 도시에서는 군 병력까지 동원됐다.

페루 사회의 변화를 요구하며 90년 대통령에 당선된 일본인 2세 후지모리 대통령은 국내에도 잘 알려진 정치인이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 민영화와 시장개방, 긴축정책 등 신경제 정책으로 연 5000%나 되던 인플레를 진정시키고, 반정부 무장게릴라들을 궤멸시켜 국내 치안을 안정시켰다. 대외관계에 있어서도 에콰도르 및 칠레와의 국경 분쟁을 해결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후지모리 대통령은 민주주의 제도를 무시하고 정치적 독단을 주저하지 않았다. 92년 4월 친위 쿠데타를 통해 여소야대의 의회를 해산하고 사법부를 봉쇄했다. 또 야당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연임을 보장하는 새 헌법을 만들어 95년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부정선거 시비 속에 다시 당선됐지만 5년 임기를 채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10년 전 변화와 개혁을 주장했던 후지모리가 이제는 독재자로서 개혁의 대상이 된 것이다.

국제사회는 이번 페루 대선을 관권과 금권에 의한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후지모리 정부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제재조치도 고려하고 있다.

아직 아시아 국가들은 아무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일본인 2세인 후지모리에 대해 일본의 입장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입장이 다르지 않은가. 국민의 정부는 페루 민주주의에 대해 ‘확실한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이다.

송기도(전북대 교수·중남미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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