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식의 과학생각]동물도 더불어 살 줄 안다

  • 입력 2000년 5월 31일 19시 19분


현충일 아침에 묵념시간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면 국립묘지에 잠든 무명용사들과 함께 일벌을 떠올리곤 한다. 일벌은 꿀을 훔쳐가는 침입자에게 침을 쏘고 스스로 죽는다. 침을 쏠 때 내장기관의 일부가 찢겨져 몸 밖으로 나오므로 죽게 되는 것이다.

무명용사나 일벌의 죽음은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개체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주기 때문에 이타적 행동이라고 한다. 이타적 행동은 같은 종(種)뿐만 아니라 다른 종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빈 고둥 껍데기 속에 사는 집게는 그들의 등에 말미잘을 짊어지고 산다. 말미잘은 게의 음식물에서 나오는 찌꺼기를 먹고 사는 대신 독이 있는 자신의 촉수로 게를 보호해 준다.

이와 같이 수많은 생명체가 협동한다는 사실은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을 강조하는 진화론에서 볼 때 하나의 패러독스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기적 개체로부터 이타적 행동이 출현하는 이유를 밝히는 것이 사회생물학의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었다. 사회생물학은 모든 사회적 행동의 생물학적 기초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생물의 이타적 행동을 설명하는 이론으로는 혈연선택과 상호 이타주의 이론이 유명하다. 혈연선택 이론에 따르면 혈연으로 맺어진 개체들은 구성원들이 공유한 유전자를 영속시키기 위해 가까운 친척에게 이타적인 혜택을 베푼다. 그러나 이 이론은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경우에는 한계를 드러낸다.

한편 상호 이타주의 이론은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개체 사이에서 이타적 행동이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한다. 상호 이타주의의 기본은 “네가 나의 등을 긁어주면 내가 너의 등을 긁어준다”는 식의 호혜적 행동이다.

그러나 호혜주의는 일종의 딜레마이다. 당신이 상대방의 등을 긁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배반하여 당신의 등을 긁어주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이러한 딜레마에서 빠져나오는 최선의 방책은 팃포탯(Tit-for-Tat)이다.

되갚음을 뜻하는 팃포탯은 “처음에는 협력한다. 그 다음부터는 상대방이 그전에 행동한 대로 따라서 한다”는 두 개의 규칙으로 구성된다. 팃포탯은 인정 많음(먼저 배반자가 되지 않음), 분개(상대방이 배반하면 따라서 배반함으로써 즉시 응징함), 관대(상대방이 배반한 적이 있더라도 다시 협력하면 따라 협력함으로써 협조 분위기를 복원시킴)의 특성을 갖고 있다. 한마디로 당근과 채찍(회유와 위협) 정책의 요체를 합쳐 놓은 전략이다.

결론적으로 팃포탯은 호혜주의에 의해 이기적인 개체들로부터 협력 관계가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거래 계약 교환 분업 양보 신뢰 의무 빚 우정 선물 은혜 등등.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무수히 듣는 이 낱말들 속에는 호혜주의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인간은 상호 이타주의에 익숙한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탁월한 장사꾼이다.

그러나 주변에는 호혜주의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타적 행동이 수두룩하다. 서울역 광장에서 헌혈하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다. 텔레비전에 병든 아이들의 딱한 사정이 소개되면 성금을 내는 통화량이 폭주한다. 남이 버린 쓰레기를 치우는 시민도 적지 않다. 인간이 이기적인 측면이 강함과 동시에 더불어 살 줄 아는 지혜를 가진 동물임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최근에는 물질적 보상을 바라지 않고 정치 환경 노동 여성 등 여러 부문에서 운동을 펼치는 시민단체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의 이타적 행동은 정의와 희망의 상징이다. 이를테면 4·13총선에서 총선시민연대가 보여준 활동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시민들이 그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낼 만도 했다.

그런데 핵심인물 한 명이 18세의 여대생을 성추행한 혐의로 쇠고랑을 차고 말았다. 사회생물학자들은 이기적 행동을 일삼는 사람을 응징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사회적 추방(오스트라시즘)을 꼽는다. 요즈음 이타적 활동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아야 할 공인들이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추태를 연출하고 있다. 5·18 전야에 광주에서 술판을 벌이거나 자식이 병역 비리에 연루된 정치인들이 발붙일 수 없도록 하루 빨리 사회의 건강성을 회복해야 될 것 같다.

이인식<과학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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