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식의 과학생각]모성애는 '운명'입니다

  • 입력 2000년 5월 3일 19시 36분


어버이날이면 많은 아버지들이 괜히 계면쩍거나 어색한 표정을 짓는다. 자식들이 카네이션 한 송이라도 가슴에 달아주면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한다. 어머니날을 어버이날로 바꾼 사람들이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아이를 임신시킨 것말고는 아내처럼 자식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아버지들로서는 어찌 해볼 수 없는 자격지심일 터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문화의 소산임과 동시에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본능이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모성애는 여성들에게 사회적으로 부과된 도덕적 임무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가령 남녀가 성적으로 평등하고 사유재산이 존재하지 않던 선사 시대의 여성들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맹목적으로 헌신하지는 않았다.

▼문화의 소산임과 동시에 본능▼

그러나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가부장적 사회 질서가 확립되면서 여성이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 외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가 됨에 따라 모성애는 문화적으로 중요한 덕목이 되었다. 앞으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갈수록 증대되면 모성애의 표현 양식은 달라질 테지만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변질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모성애는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모성애는 종의 보존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본능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여자라야 자식의 생존을 위해 헌신할 것이므로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모성애가 종의 보존을 위해 여성의 본능으로 자연 선택된 것이다. 요컨대 여자의 자식 사랑은 후천적으로 습득된 소양임과 동시에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향이라 할 수 있다. 모성애가 본능임을 보여주는 증거는 여자가 어머니다운 행동을 보여줄 때 몸 안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이다. 임신과 출산 전후에 임산부와 아기 사이의 사랑을 결속시키기 위해 큰 변화를 일으키는 호르몬은 프로게스테론 에스트로겐 프로락틴 옥시토신 등 네 종류이다. 프로게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은 난소에서 분비되는 성호르몬인데 임신 기간 내내 분비량이 완만히 상승하다가 출산 직전에 급격히 감소된다. 두 호르몬은 여성의 몸을 더욱 여성스러운 상태로 만드는데 기여한다.

출산 직후부터는 뇌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인 프로락틴과 옥시토신의 혈중 농도가 급격히 높아진다. 두 호르몬은 산모가 어머니로서 자식을 양육하는 행동을 준비하도록 작용한다. 이를테면 프로락틴은 유방에서 젖이 생산되도록 촉진한다.

옥시토신은 자궁 근육의 수축을 자극하여 태아의 분만을 용이하게 할뿐더러 유선 주변 근육세포의 수축을 자극해 유두에서 모유가 나오게 한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어머니의 젖꼭지가 금세 꼿꼿해지면서 당장 젖 먹일 채비가 되는 것은 어머니의 몸에서 조건 반사적으로 옥시토신의 분비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동물의 세계에는 암컷이 수태한 기간에 수컷이 호르몬의 변화를 겪는 사례가 없지 않다. 일부일처 위주인 조류의 경우 수컷은 새끼를 돌볼 뿐만 아니라 새끼가 태어나기 전에 호르몬의 변화를 일으킨다. 1997년 캘리포니아 생쥐의 수컷이 훌륭하게 아비 노릇을 하고 있음이 밝혀져 학계를 놀라게 했다. 수컷 생쥐는 산파처럼 암컷의 해산을 도와주고 갓난 새끼를 보살폈다. 더욱 흥미로운 연구 결과는 수컷이 옆에 있을 경우 출산 소요 시간은 29분이었지만 곁에 없으면 55분으로 거의 두 배 더 걸렸다는 사실이다. 수컷이 체내에서 옥시토신을 분비하여 암컷의 해산을 자극한 것으로 짐작된다.

▼임신기간 남자의 몸도 작은 변화▼

그동안 학계에서는 남자들이 아버지가 되기 위해 호르몬의 변화를 겪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1999년 캐나다의 연구진이 배우자가 임신한 동안에 남자의 체내에서 프로락틴 코티졸 테스토스테론 등 호르몬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

코티졸은 임신중에 여자 몸에서도 분비되는 스트레스 호르몬이고 테스토스테론은 남성 호르몬이다. 또한 임신 기간에 예비 아버지들의 75% 가량이 피로, 식욕 이상, 체중 증가를 경험한 사실이 밝혀졌다. 사내들이 여자를 임신시키고 얼렁뚱땅 몇 달을 보낸 뒤에 그냥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고 해서 부성애를 모성애에 견주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줄로 안다.

이인식(과학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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