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재벌2세여, 자기 길 찾아라

  • 입력 2000년 4월 25일 20시 33분


얀 필립 렘츠마라는 남자가 있다. 나이는 마흔일곱. 직업은 문예연구자이며 학술 후원자. 책을 여러 권 썼는데, 그 중에는 ‘무하마드 알리의 복싱 스타일 연구’라는 좀 별난 것도 있다. 그는 저명인사이지만 대중 앞에 좀처럼 얼굴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렘츠마가 한동안 독일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은 일이 있다. 1996년 4월 공개된 납치사건 때문이었다.

렘츠마는 함부르크의 자기집 정원에서 납치됐고, 거기에는 협박편지와 수류탄 하나가 놓여있었다. 그가 장장 32일 동안이나 농가 지하실에 갇혀있는 동안 그의 아내는 지방신문 생활광고란을 통해 범인과 끊임없이 접촉했다. 언론은 렘츠마가 풀려난 사실이 확인된 순간까지 철저하게 침묵을 지켰다. 독일 범죄사에 일찍이 없었던 3300만마르크(약 200억원)의 거액을 챙긴 범인들은 경찰의 집요한 추적을 따돌리고 잠적했다. 하지만 비상한 관찰력과 기억력을 지닌 렘츠마가 수사의 결정적인 단서를 여러가지 제공함으로써 경찰은 범인 둘을 체포하고 돈도 대부분 되찾았다.

▼상속받은 돈 문화사업에 투자▼

렘츠마는 문예 연구로 재산을 모은 것이 아니다. 출생이라는 거대한 제비뽑기에서 ‘대박’을 터뜨린 행운아였을 뿐이다. 조부가 세운 렘츠마 담배회사를 상속받음으로써 세살 때 벌써 엄청난 갑부가 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성인이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후견인들이 관리해 온 담배회사 지분을 몽땅 팔아치웠다.

그리고는 그 대가로 받아쥔 현금 3억마르크를 가지고 문학과 비판적 사회과학 연구를 후원하는 엉뚱한 사업을 시작했다. 예컨대 1984년 함부르크에 설립한 사회문제연구소는 유럽에서 가장 활발한 사회과학 연구기관 가운데 하나이다.

렘츠마는 이러한 ‘기행(奇行)’의 동기를 묻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나는 돈이 내 인생을 규정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달리 표현하면 상속받은 기업에 묶여 돈 버는 일에 인생을 탕진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웬 다른 나라 ‘괴짜갑부’ 이야기를 하느냐고? 삼성과 현대, LG 등 10여개 재벌그룹 총수 일가의 변칙 상속과 증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국세청이 주식 이동 상황과 주식 매입자금 출처를 조사한다는 보도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재벌 총수들은 세금을 한푼도 내지 않거나 내는 시늉만 하고서 엄청난 재산을 아들들에게 물려준다. 그런데 그들은 이것을 가리켜 탈세가 아니라 ‘절세(節稅)’라고 한다. 주식연계형 사채를 통한 변칙 증여 등 기기묘묘한 ‘절세의 마법’을 쓰는 총수 일가들과 그 마법을 깨뜨리기 위해 계좌추적권까지 동원하는 국세청의 쫓고 쫓기는 싸움을 보노라면 만화 ‘톰과 제리’의 한 장면이 저절로 떠오른다.

재벌그룹 창업자들의 욕심이야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경영의 천재든 로비의 귀재든 간에, 어쨌든 그들은 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사업을 벌여 자기 손으로 거대한 기업집단을 창조했다. 거기서 다른 어떤 일에서도 얻을 수 없는 인생의 보람과 행복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니 기왕이면 그걸 남보다는 자기 자식의 손에 넘겨주고 싶지 않겠는가.

▼경영능력 유전된다는 증거 없어▼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2세들이다. 경영능력이 유전된다는 생물학적 증거는 전혀 없다. 이것은 재벌가의 2세들이 창업자만큼 기업 경영을 잘 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음을 의미한다. 사람은 자신이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스트레스를 덜 받고 보람은 더 많이 느낀다는 일반적 원리에 비추어 볼 때 재벌 2세들이 그 아버지들처럼 거기서 보람과 행복을 맛볼 확률 역시 그리 높지 않다. 그러니 참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밖에. 우리나라에서는 부모 잘 만난 행운은 행운대로 인정하되 자기 인생은 나름의 철학에 따라 나름대로 개척해 나가는 렘츠마 같은 이가 나오지 않으니 말이다. 어느 재벌 2세가 상속받은 재산을 몽땅 팔아 좋은 대학을 하나 세운다면 그 얼마나 아름다울까.

재벌의 족쇄를 벗어야 하는 것이 어찌 국민경제만이랴. 재벌 2세들도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 그 자신의 인간적 행복을 위해서.

유시민(시사평론가)denkmal@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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