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이란 1953년 '친위 쿠데타' 美CIA 주도

  • 입력 2000년 4월 18일 19시 28분


1953년에 이란에서 일어난 군사 쿠데타는 선거에 의해 선출된 총리를 몰아내고 샤 팔레비에게 권력을 돌려주었다. 그러나 이 쿠데타가 일어난 지 50년이 다 되어가도록 쿠데타에서 미국이 수행한 역할은 역사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런데 아직도 기밀로 분류되어 있는 문서를 이번에 뉴욕타임스가 입수함으로써 숨겨진 역사가 드러나게 되었다.

▼쿠데타의 배경▼

쿠데타의 뿌리가 된 것은 영국과 이란의 관계였다. 영국은 2차 대전 중에 석유가 나치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이란을 점령하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란의 석유를 좌지우지했다.

그런데 1951년에 이란 국회가 석유의 국영화를 결정하자 영국은 1952년에 석유 국영화를 앞장서서 지지하던 모하메드 모사데그 총리를 몰아내는 합동작전을 펴자고 미국에 제의했다. 처음에 트루먼 대통령은 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3년에 석유 확보와 공산주의 저지를 명분으로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란이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소련의 손에 넘어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1953년 3월에는 이란의 장군 한 명이 군사 쿠데타를 지원해달라며 미국 대사관에 접근했다는 소식도 중앙정보국(CIA) 테헤란 지부로부터 들어왔다.

앨런 덜레스 CIA 국장은 4월 4일에 모사데그를 몰아내는 비용으로 100만 달러를 지출할 것을 승인했고, CIA 관리들은 곧 파즈롤라 자헤디 장군을 쿠데타의 선봉으로 선정했다. 이 계획에서 샤 팔레비는 자헤디와 함께 쿠데타를 이끄는 역할을 맡아야 했다.

그러나 CIA 관리들은 팔레비가 과연 TP-Ajax라고 명명된 이 대담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지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천성이 우유부단하고, 애매모호한 의심과 두려움에 싸여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헤디 역시 “추진력이 부족하고 구체적인 계획이 없는 사람”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CIA 테헤란 지부는 모사데그에 대한 ‘흑색선전’을 시작했다.

▼작전수립과 갈등▼

영국과 미국의 관리들은 1953년 5월과 6월에 잇달아 회담을 갖고 전략을 짰다. 곧이어 CIA 근동 및 아프리카국 국장이자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손자인 커미트 루스벨트가 작전지휘를 위해 테헤란에 도착했다.

팔레비는 처음부터 문제를 일으켰다. 계획에 따르면, 그는 CIA가 민심을 교란시켜서 나라가 혼란해진 다음 모사데그를 해임하고 자헤디를 총리로 임명한다는 칙령을 발표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칙령에 서명을 거부했다. CIA는 그의 쌍둥이 누이인 아슈라프 공주에게 도움을 청했다.

공주는 팔레비에게 그의 친구이며 이란 주둔 미군사령관이었던 노먼 슈와르츠코프 장군(91년 걸프전 ‘사막의 폭풍’ 작전 미군사령관 슈와르츠코프 장군의 아버지)이 이번 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고 알렸다. CIA는 또한 종교계의 반공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이란인 CIA 직원들이 공산주의자를 가장하고 이슬람교 지도자들에게 ‘모사데그에 반대하면 끔찍한 처벌’을 내리겠다고 위협하도록 했다

영국도 팔레비를 설득하려고 애썼지만, 팔레비는 “상황을 평가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할 뿐이었다.

이 때쯤에는 모사데그도 음모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는 국회를 해산하기 위한 국민투표를 요구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했다. 그는 국민투표에서 99.9%의 찬성표를 얻었다. 그러나 이는 CIA가 지원하는 야당 언론의 공격거리를 만들어줌으로써 쿠데타 계획에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팔레비는 여전히 칙령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8월 4일 시애틀에서 연설도중 이란이 철의 장막 뒤로 떨어지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지는 않겠다고 밝히고, 루스벨트가 이란을 떠나버릴 것이라고 협박을 한 뒤에야 칙령에 서명했다.

▼초기 상황▼

쿠데타는 8월 15일 밤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모사데그는 한 장교로부터 이미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라는 경고를 받은 상태였으므로 모사데그 측의 합참의장인 타기 리아히 장군은 왕궁 수비대 막사로 자신의 부관을 파견했다. 그러나 이 부관은 다른 고위장교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쿠데타군은 군부와 정부 사이의 전화선을 끊어버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전화는 계속해서 작동되었다. 이것이 모사데그 측에게는 커다란 이점이 되었다. 리아히 장군 역시 체포를 피해 총리를 지지하는 지휘관들을 규합했다. 덕분에 모사데그를 체포하러 그의 집으로 갔던 팔레비 측 군인들이 오히려 억류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다음날 아침 테헤란 라디오 방송은 쿠데타가 실패했으며, 모사데그가 군부와 주요기관을 모두 장악했다고 발표했다. 미국 대사관 안에 있던 CIA 관리들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이 아직도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모사데그는 팔레비가 이라크의 바그다드로 도망치고 쿠데타 관련 장교들 중 일부가 체포되자 8월 17일 시내에 주둔시켰던 병사들을 불러들였다. 그날 밤 CIA는 자헤디 장군을 비롯한 장교들과 이란 측의 중요 인물들을 몰래 대사관으로 불러들여 ‘참모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팔레비는 바그다드에서 다시 로마로 도망침으로써 CIA를 크게 실망시켰다. CIA 이란 지부는 본부에 훈령을 요구했고, 본부는 절망 속에서 하루를 보낸 후 작전이 실패했으며, 모사데그에 대항하는 활동을 중지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쿠데타 성공▼

그러나 미국이 활동을 중지하려했던 바로 그 때 테헤란의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테헤란에서 발행되는 일부 신문들이 8월 19일 아침에 드디어 팔레비의 칙령을 보도했고, 팔레비를 지지하는 군중이 거리에 모이기 시작했다. CIA를 위해 활동하는 이란 측 인사들 중 한 명이 곧 군중앞에 나서 사람들을 이끌고 의사당으로 행진했으며, 모사데그 정부의 외무장관이 소유하고 있는 신문사 건물에 불을 지르도록 선동했다.

사태는 CIA 관리들이 미처 대응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진행되었다. 오후 1시가 되자 중앙 전신국이 시위대의 손에 떨어졌고, 잠시 총격전이 있은 후 경찰본부와 외무부 건물, 테헤란 라디오 방송국도 함락되었다. 팔레비측 인사들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쿠데타의 성공을 선포했다.

(http://www.nytimes.com/library/world/mideast/041600iran-cia-index.html)

▼모사데그총리는 누구▼

호메이니를 제외하면, 20세기 이란의 정세에 모사데그 만큼 깊은 흔적을 남긴 사람은 없다. 또한 그를 권좌에서 몰아낸 쿠데타만큼 20세기에 이란인들이 미국을 의심하게 되는데 큰 영향을 미친 사건도 없다.

관료인 아버지와 페르시아 왕의 후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유럽에서 교육을 받고 변호사가 된 모사데그는 1920년대에 레자 왕의 즉위를 반대한 혐의로 가택연금을 당했다.

그리고 1941년에 영국과 소련의 압력으로 인해 레자가 물러나고 그 아들인 팔레비가 즉위했을 때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는 파자마를 입은 채 침대에서 정무를 보고, 대중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자신의 건강상태에 대해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는 등 괴상한 버릇들을 갖고 있었지만, 이란의 석유 국영화를 추진한 덕분에 제3세계 국가들로부터 반(反)제국주의의 상징으로 존경을 받았다. 국내에서도 그의 인기는 대단해서 팔레비가 그를 해임하려 했을 때 거리에서 시위가 벌어질 정도였다. 미국은 모사데그를 지지하는 이란 공산당의 힘이 강해지는 것에 긴장했다.

쿠데타 후 모사데그는 3년을 감옥에서 복역했으며, 자신의 소유지에서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다가 1967년에 후두암으로 사망했다.

▼기록남긴 美스파이 윌버▼

이란의 쿠데타 작전에 참여하고 그 사건의 비밀스러운 전말을 기록으로 남긴 도널드 윌버는 중동지역 건축물 전문가로서 ‘신사 같은 스파이’의 전형에 잘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그는 건축물 답사를 위해 중동지역을 쏘다녔기 때문에 은밀한 임무를 수행하기가 쉬웠다.

그러나 뛰어난 학자였던 그도 CIA에서는 정식직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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