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배인준/벤처기업 숫자놀음

  • 입력 2000년 4월 18일 19시 28분


17일 주가 대폭락 소식에 묻혀버린 정부 발표가 하나 있었다. 국내 벤처기업수가 6000개를 돌파했으며 지난달에만 458개나 늘었다는 집계였다. 정부는 벤처기업수를 올해 1만개로, 2002년까지 2만개로 늘리겠다고 열심히 홍보해왔으니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겠지.

▷증시 불안이 거래소시장에서도 걷히지 않았지만 특히 작년 이후 벤처기업들이 상장러시를 이룬 코스닥시장이 더 심하다. 주가 거품붕괴는 벤처기업 중에서도 제조업체보다 이른바 ‘닷컴’으로 통칭되는 인터넷기업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벤처업계에선 ‘올 것이 왔다’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연초부터 어느 정도 예견은 했던 상황이라는 담담한 반응도 있다. 뚜렷한 수익 전망도 없이 비정상적 투자열풍을 조장하거나 그런 분위기에 편승한 뻥튀기 주가가 오래갈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상당수 벤처기업은 아직 여유 있는 모습이다. 주가는 반토막 났지만 유상증자 등으로 조달한 자금이 넘쳐 ‘당분간은’ 문제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본래 자신들이 키우려 했던 사업영역을 벗어나 금융업을 넘보거나 재테크에 몰두하는 벤처기업가도 있다. 이들 중에는 근본적으로 벤처정신이 의심되는 사람도 있고, 한껏 노력은 했지만 비즈니스 모델 개발의 한계에 부닥친 쪽도 있어 보인다. 벤처기업에서 신경제의 가능성을 발견하기는 너무 이르거나 무망(無望)한 것일까.

▷그렇게는 단정하고 싶지 않다. 주가폭락과 벤처기업에 대한 사회적 의심 때문에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남다른 수익모델을 찾아 매진하는 벤처맨들도 많다. 증시를 덮친 거품붕괴의 충격이 ‘무늬만 벤처’들을 솎아내고 진짜 벤처들의 성공을 촉진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쉽지는 않다. 원본의 기술과 아이디어 없이 미국 등 선진국 벤처들의 복사에만 매달리는 한 밝은 미래를 약속받기 어렵다. 또 정부가 벤처기업을 육성한다면서 업체수 늘리기의 숫자놀음을 그치지 않는 한 앞으로도 벤처 거품을 막기 어렵다. 그건 실적도 뭣도 아니다. 벤처정책에서도 정부가 재벌들에 요구하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시행착오는 이제 그만하면 됐다.

<배인준논설위원>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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