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80돌 특집/벤처21]어려운 순간 이렇게 극복

  • 입력 2000년 3월 31일 21시 31분


홍성범 세원텔레콤사장을 처음 만난 사람에게 가장 첫 눈에 들어오는 인상은 바짝 깎은 스포츠형 헤어스타일. 단단한 체구에다 머리 모양까지 투박하니 첫 인상은 도무지 ‘사장님’같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그가 굳이 이런 스타일을 고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렇게 짧게 깎으면 서너달은 이발을 안해도 돼 편합니다. 날마다 머리를 빗을 필요도 없으니 그만큼 일할 시간을 벌 수 있죠.”

일분 일초를 아끼는 습관은 10여년전 세원텔레콤을 창업할 때부터 ‘본능’처럼 몸에 밴 것이다. 홍사장뿐만 아니라 성공을 일군 벤처기업가들은 거의 예외없이 ‘일벌레’들이다. 회사 사무실에는 으레 갈아입을 옷과 와이셔츠 세면도구에 야전침대가 ‘필수품’처럼 갖춰져 있다. 며칠씩 밤을 새워 일하다 간혹 ‘퇴근’할 때면 “집에 다녀오겠습니다”는 말이 자연스레 나온다.

아이디어 하나 달랑 들고 창업한 벤처기업인들에게 최대의 자산은 역시 땀과 열정. 지금은 성공한 1세대 벤처기업들에게도 가시밭길은 있었고, 거기에 걸려 넘어질 때마다 열정 하나로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홍사장만 해도 창업 초기인 91년 최대 위기를 맞았다. 당시 홍사장은 대기업으로부터 반도체 검사장비인 웨이퍼를 개발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연구개발에 들어갔다.

그러나 막상 제품을 만든 뒤 찾아가자 대기업은 말을 바꾸었다. “납품을 받아주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했던 담당임원은 “위에서 ‘검증 안된 국산품을 왜 쓰냐”고 한다며 없던 일로 하자는 것이었다.

“3년간 집에 돈 한푼 못갖다주면서 개발한 건데…. 눈앞이 캄캄하더군요.”

홍사장이 빗물 젖은 액자 하나를 귀중품처럼 고이 간직하고 있는 것은 어려웠던 옛날을 절대 잊지 말자는 다짐에서다. 이 액자는 과거 돈 때문에 수없이 이사를 다니면서 빗물이 새는 건물에 세들어 있을 때의 ‘기록’이다.

홍사장뿐만 아니다. 지금은 벤처기업의 ‘대부’로 불리는 미래산업 정문술사장에게도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힘든 시절이 있었다. 18년간의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고 46세의 늦은 나이에 회사를 세운 것이 83년. 6년여 동안 실패를 거듭하면서 반도체 자동검사장치에 눈을 돌린 그는 88년부터 2년간 매출의 80∼90%를 들여 신제품 한가지 개발에 매달렸다. 친척과 친구들로부터 있는대로 돈을 끌어다가 연구비로 쏟아 부었다. 그러나 고생 끝에 개발한 장비는자신이 보기에도 결점투성이. 아무도 사주는 데가 없었다.

매일같이 찾아드는 빚쟁이들에게 시달린 정사장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나 등산길에 죽으려고 하는 순간 “지금까지 쏟아부은 노력이 아깝다”는 생각이 오기처럼 그를 돌려세웠다.

한 달간 밤을 새워가며 개발한 시제품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줬고 예상치 못한 행운까지 찾아와줬다. 일본이 반도체 제조장비의 공급조건을 까다롭게 하면서 삼성전자 등 국내 반도체 업체들이 미래산업의 기술력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

우연한 계기로 인생이 바뀐 경우도 있다. 핸디소프트 안영경사장의 원래 희망은 의사였다. 그러나 의대에 낙방한 뒤 읽은 책 속의 한 문구가 그의 인생을 갈랐다.

‘소프트웨어는 예술이다.’

이 한마디에 ‘감전’된 그는 바로 진로를 바꿔 당시 국내 유일의 컴퓨터 관련학과를 둔 숭실대 전산학과에 진학했다. 박사과정 중 컴퓨터 필기 인식기술을 개발한 그는 박사학위를 신청하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학위를 따려면 외국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외국기업이 기술을 가로채 먼저 상품화할 우려가 있었다. 그후 과감히 독자창업에 나섰고 지금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비트컴퓨터 조현정사장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교 졸업후 전자제품 수리상에서 종업원으로 일했던 이력이 있다. 늦깎이로 인하대에 진학한 그는 교내에서 각종 고장난 물건을 고치는 ‘수리센터’를 운영하면서 학비를 벌었다. 그러나 이때의 고생했던 경험은 훗날 기술력의 밑바탕이 됐다.

<이명재기자> 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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