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윤종훈/국민의 의무도 못한 者들이

  • 입력 2000년 3월 30일 19시 44분


국가라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국민이 공평하게 지켜야 할 두가지 의무가 있다.국방의무와 납세의무이다. 이 두가지 의무를 제대로 지키지 않은 사람에게 정치를 맡길 수는 없을 것이다. 이번 총선부터 후보자의 병역사항과 납세실적을 공개하도록 한 점은 비록 늦은 감이 있지만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다. 공개 결과 일반 국민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정치인 또는 정치지망생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952명의 후보자중 3년 동안 소득세 납세실적이 전혀 없는 사람이 177명이며, 비록 세금을 냈더라도 3년간 납세실적이 100만원미만인 사람이 147명이었다. 결국 후보자중 3년간 납세실적이 100만원 미만인 사람은 324명으로 전체 후보자의 34%를 차지한다. 연봉 2000만원 정도의 4인가족 근로자가 3년간 100만원 정도의 세금을 낸다. 그렇다면 정치인과 정치지망생의 34%가 겨우 먹고 살 만한 수준에도 못미치는 소득을 얻고 있다는 것인가? 이들은 그동안 무엇을 먹고 살았으며, 앞으로 어떻게 선거를 치를 생각인가? 100억원대의 재산가중 납세실적이 전혀 없는 사람도 있다. 무슨 귀신같은 재주를 가졌기에 세금 한푼 내지 않고 100억원대의 재산을 모을 수 있었을까?

정치인들의 납세실적과 관련해 쏟아지는 수많은 의문에 그들은 나름대로 대책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예상되는 답변을 보자.

“내가 비록 수십억원대의 재산가라고 하지만 몇년전만 해도 지금 보다 재산이 훨씬 많았어요. 몇년 동안 가진 재산을 까먹고 있었는데 무슨 세금을 냅니까?”

“부족한 수입은 후원금으로 메웠어요. 후원금은 세금을 안내지 않습니까?”

“그동안 민주화운동, 재야 활동을 하느라고 돈벌이 할 여유가 없었어요. 부인의 소득에 의지하거나 주위에서 도와 주었죠.”

이중에는 진실도 있고 거짓도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옥석을 가려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 추상적인 통계치로 후보자들을 싸잡아 비난하거나 의혹을 제기하다 보면 진정으로 억울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다른 사람과 함께 도매금으로 대충 넘어가는데 대해 다행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얼마전 총선연대에서 현역 국회의원중 16대총선 출마자들을 대상으로 자녀의 재산증식과정을 조사한 바 있다. 만약 국회의원의 자녀가 부모나 다른 친족으로부터 증여받은 돈으로 재산을 증식한 것이라면 증여세를 제대로 신고 납부하였는지 밝혀내기 위해서이다. 조사결과 13명의 의원에 대해 공개해명을 요구했다. 해명 유형을 보면 ‘너희들이 뭔데 그런걸 조사하느냐. 해볼테면 해보라’는 식의 반응을 보인 의원이 가장 많았다. 정치판을 잘 아는지라 돈과 지역감정의 배경을 든든하게 믿고 있는 모양이다. 나름대로 해명을 했지만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의원의 자녀가 10대일 때 상당한 액수의 부동산을 취득했는데 생일이나 졸업식때 들어온 축의금이 취득자금 출처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나라에서 증여세를 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돌 반지 판 돈, 설날의 세뱃돈, 축의금과 용돈 등으로 얼마든지 취득자금 출처를 주장할 수 있을테니까.

97년 이탈리아의 언론재벌이며 야당 지도자였던 베를루스코니가 탈세혐의로 기소됐다. 그가 세무조사 공무원에게 봐달라고 뇌물을 주자 뇌물공여 혐의가 추가돼 재판을 받았다. 미국 하원의장을 지낸 깅그리치가 탈세혐의로 국세청으로부터 조사를 받게 되자 미국하원 윤리위원회는 그를 징계하는 권고안을 찬성7, 반대1로 통과시켰으며, 그는 자진해 의원직을 내놓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쯤 이러한 일이 가능할까? 세금탈루의 의혹을 받고서도 뉘우치기는커녕 말도 안되는 변명을 늘어놓거나 심지어 “너희들이 뭔데 그러느냐”고 큰소리치는 정치인들을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답답하다. 이제 유권자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이다. 동창회비를 떼어먹는 사람에게 동창회장을 맡길 수 없듯이, 세금을 떼어먹는 사람에게 정치를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윤종훈(회계사·참여연대 조세개혁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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