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전국구 요지경을 보니

  • 입력 2000년 3월 28일 19시 41분


4·13총선거를 앞두고 각 정당이 발표한 비례대표 명단을 보면 이 나라 정치의 현실과 실체가 잡힐 듯 다가온다. 한마디로 여야를 막론하고 전국구 의원을 두는 제도상의 취지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한 표만 이기더라도 대표가 되는 지역구 다수대표제의 문제점을 보완, 진 쪽의 표를 의회에 반영한다는 비례대표제의 의미는 찾아보기 어렵다. 또 직능성 전문성을 보태자는 취지도 온데 간데 없다. 실망스러운 정치의 축소판이 바로 비례대표 명단이다.

낙천자 배려, 총재측근 우선이 두드러진다. 민주당의 경우 지역구에서 탈락한 2명은 총재측근이라는 이유로 당선권에 눌러앉았고, 또 낙천한 한 명은 이른바 ‘농민 대표’ 이름으로 20번 안에 들어섰다. 한나라당의 낙천자 봐주기는 더 노골적이다. 20번 안에 현역의원이 11명이나 되는데, 그 중에 총재나 선거대책위원장은 제외하더라도 낙천자 배려가 지나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역구 경쟁력이 별로여서 공천을 주지 않은 인사들을 전국구에 무더기로 무임승차시키듯이 쓸어 담은 것이다. 이것이 입버릇처럼 말해온 ‘정치개혁’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일부 돈공천 냄새마저 물씬 풍긴다. 특히 자민련과 민국당의 경우 ‘재력’을 빼놓고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지명도 낮은 인사들이 1번 혹은 5번 이내에 진입해 있다. 만일 수십억원의 돈 거래를 전제로 한 공천이라면 이것은 정치의 도덕성 차원을 넘어서는 범법이요, 범죄라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다. 정치자금법은 ‘이 법에 의해서만 정치자금을 주고받을 수 있다’ ‘정치자금은 의혹을 사는 일이 없도록 공명정대하게 운용되어야 하고 그 회계는 공개되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래서 돈공천은 정치인들이 스스로 만든 법을 짓밟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또 해당자로 하여금 금융실명거래법을 어기게 하고 정치비자금을 만들게 하며, 정당은 회계장부도 없이 이 돈을 쓸 수밖에 없는 이중 삼중의 죄와 악을 유발한다. 개혁을 지상과제로 말하는 이 시대에 이런 불법 타락범죄가 정당의 이름으로 자행되어도 좋은지, ‘총선거에 돈이 들기 때문에’라는 변명으로 어물어물 넘겨도 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야당의 경우 여성배려도 소홀했다. 지난번 개정된 정당법에는 여성 몫으로 30%를 배려하도록 되어 있으나 제1야당인 한나라당도 당선권 안에는 20%를 배려했을 뿐이다. 우리 정당의 한계를 확인하는 것 같아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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